[일사일언] 수박에 담긴 온기
가끔 계절이 제철 행운을 선물해 줄 때가 있다. 어제는 수박을 샀다. 사분의 일 정도로 잘린 조각이었다. 35도를 웃돌던 날씨. 땡볕을 견디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카페 입구에 붙어 있던 수박 주스 사진이 내 발길을 자연스럽게 마트로 이끌었다. 새삼 수박을 못 먹은 지 한참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게 된 지 9년째. 일인 가구의 구성원에게 수박처럼 큰 과일은 어딘가 사치스러운 구석이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8킬로그램이란 숫자에 겁을 먹고 있는데 다행히 분할된 수박들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눈길을 끄는 포장이 있었으니, 세모난 플라스틱 안에 수박을 담고 손잡이까지 달아 귀여운 손가방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었다. 왠지 모를 귀여움에 제법 큰 그 조각을 덜컥 사버렸다.
낑낑거리며 수박 가방과 장바구니를 들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좋은 가방 장만했네, 하며 말 그대로 킥킥 웃어 보이셨다. 평소라면 붐비는 지하철에서 인상을 잔뜩 쓰고 바닥만 보고 있었을 나도 수박을 자랑하듯 들어 보이며 천진스럽게 웃었다. 요즘은 이런 게 다 나오네, 라며 함께 전철에 탄 아주머니는 내게 자리를 권하고, 사소한 안부를 물은 후 내리는 역에서 살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집으로 걸어가는데 수박 가방을 꼭 움켜쥔 손끝에서부터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혼자 책상에 앉아서 글을 읽고 쓰는 직업을 가진 나는 활자 안에서 사랑과 다정함을 찾는 일에 몰두하다가, 정작 현실에서는 고립될 때가 많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예 관계 맺기를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제 같은 하루를 마주할 때,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수박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다. 맛있는 부분들을 작은 그릇에 담아 경비 아저씨께 드렸다. 맛있는 수박은 혼자 먹는 것보다 나눠 먹는 게 훨씬 다니까.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과 함께 비타민 음료를 답례로 받았다. 서울에 가족들은 없지만, 가끔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있다. 무더운 여름, 사람들에게서 따갑지 않은 온기를 얻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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