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세종이 문필가를 키운 까닭은

기자 2023. 7.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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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고가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서울 ‘압구정’동은 본래 조선 시대 유명한 인물인 한명회가 지은 정자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정자 이름을 지은 이는 한명회 자신도 아니고 당대 조선 사람도 아닌 명나라의 예겸(倪謙)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에서도 문필로 이름 높았던 인물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세종이 사망한 해인 1450년에 명나라 한림원 시강 벼슬에 있던 예겸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처음에 예겸은 자신의 시 짓는 솜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조선에 와서 처음 지은 시를 본 후 조선 관리들은 한편으로 안도했고, 다른 한편으로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한강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파티를 벌였다. 겉으로는 질탕한 유흥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치열한 외교의 장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자 문필가였던 전통시대 중국 사신과 조선의 관리는 각자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시를 통해 글재주를 겨루었다. 한강에서 배가 나아가며 보여주는 강가 풍경을 소재로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당시 예겸은 35세였고, 그를 상대하는 조선 측 책임자인 관반사(館伴使) 정인지는 그보다 열아홉 살이나 많은 54세였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따르면 예겸이 먹을 찍어 붓을 휘두를수록 명시가 나오는 것을 보자, 동승한 조선 관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정인지도 대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정인지도 젊은 시절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다.

이 소식이 곧 세종에게 전해졌고 그는 성삼문과 신숙주를 급파했다. 성삼문은 예겸보다 세 살 적은 32세였고, 친구 신숙주는 33세였다. 세 사람은 끊임없이 시를 지어 이어가면서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 된다. 다시 <용재총화>에 따르면 예겸은 “두 선비를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고 서로 시를 주고받기를 그치지 않았다. 예겸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그들은 서로 눈물을 닦으면서 작별했다”고 한다. 성현은 성삼문보다 스물한 살이나 적지만, 선상에서의 시작(詩作) 경쟁 장면을 생생하게 적을 수 있었던 것은 큰형 성임 덕분이다. 성임은 성삼문보다 세 살 적지만 신숙주, 성삼문과 함께 관직생활을 했다.

이해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황화집(皇華集)>이 나온다. 예겸, 성삼문, 신숙주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황화’는 중국 사신을 뜻한다. 이후 황화집 간행은 관례가 되어 왕대마다 발간되었다. 영조 때는 각 시대의 황화집을 모아 간행하기도 했다.

조선이 건국 이래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항 중 하나가 중국과 평화적 교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중국은 얻어낼 것도 많고 조심할 것도 많은 상대였다. 중국과의 전쟁은 조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세워 문필에 뛰어난 인재를 키운 이유 중 하나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 갈등을 관리할 수 있었다.

긴 시간에 걸쳐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면 묘한 특징이 발견된다. 한국과 중국의 역대왕조는 건국과 패망 시기가 비슷하다. 심지어 전통시대가 끝난 20세기에도 그렇다. 대한제국이 1910년에 패망했고, 2년 뒤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가 패망했다. 또 한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1년 뒤에 건국되었다. 또 흥미롭게도 송나라, 명나라 같은 한족 계열 왕조와는 전쟁이 없었던 반면, 한족이 아닌 왕조인 원나라, 청나라와는 큰 전쟁이 있었다.

근년에 들어 한국과 중국 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그렇고 민간 차원에서도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외교는 한쪽의 노력으로만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없다. 역사를 통틀어 양국 관계의 안정은 서로에게 국내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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