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베토벤의 간

기자 2023. 7. 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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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뇌에 철이 든다. 2022년 쥐 실험으로 국내 연구진이 밝힌 결과다. 젊은 쥐보다 늙은 쥐의 운동 신경을 관장하는 부위에 철이 더 쌓였다. 다행인 점은 신경을 보호하는 유전자도 함께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다. 몸 안에 철이 많이 쌓인 인간이 알츠하이머병에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철은 세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생명체에 아주 중요한 물질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 안에 든 철은 다 합쳐도 3g 정도에 불과하다. 절반 이상은 적혈구에 분포하고 산소를 운반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간에도 1g 정도가 들어 있다. 해독작용에 철 원소가 필요한 까닭이다. 오래된 적혈구를 깨는 비장에도 철이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적혈구에서 나온 철은 혈액을 따라 골수로 운반되고 혈구 세포가 만들어질 때 거기에 다시 들어간다. 철은 쉼 없이 순환하지만 소화기관을 거쳐 몸 안으로 들어오는 철의 양은 하루 1~2㎎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그만큼의 철이 매일 몸 밖으로 나간다. 하루에 빠져나가는 1.5g의 각질에도 철이 들어 있다. 월경으로 한 달에 한 차례씩 피를 잃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빈혈 같은 철 부족 문제가 심각하리란 점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올 3월 음악의 성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B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 탓에 간경화로 죽었으리라는 연구 논문이 ‘최신 생물학’에 실렸다. 베토벤 것이 확실시되는 머리카락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였다. 그전까지는 베토벤이 납 중독으로 죽었으리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미국 연구진의 실험에 바탕을 둔 이런 분석을 두고 베토벤이 납으로 만든 병에 포도주를 넣어 마셨다는 둥, 중금속에 오염된 민물고기를 자주 먹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무성했다. 이에 대해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진은 베토벤 것이 아니라 신원 불상의 여성 머리카락을 분석했다면서 미국 과학자들의 납 중독 결론이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일축했다. ‘베토벤의 건강 문제를 밝히고자’ 머리카락을 분석한 독일 연구진은 베토벤의 건강을 해쳤을 후보 유전자를 둘 찾아냈다. 그들은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돌연변이체 유전자에 초점을 맞추었고 베토벤의 사인을 간경화로 최종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베토벤이 20대 후반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했던 일과 만성 복통을 겪었던 이유는 모르쇠로 얼버무렸다.

독일 연구진이 간과한 나머지 돌연변이 유전자는 부모 둘 중 한쪽에서만 물려받은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유전자가 체내에서 철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베토벤에게 철 문제가 생겼으리라는 뜻이다. 유전자 돌연변이 탓에 헵시딘(hepcidin)이란 호르몬 생산에 문제가 생긴 혈색증 환자는 몸에 철이 부족하다고 여겨 소화기관에서 거침없이 철을 흡수한다. 몸에 철이 넘쳐나는 것이다. 몸 여기저기 철이 쌓이면 주요 장기가 망가진다. 평소 철 보유량이 많은 간은 말할 것도 없고 콩팥, 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심하면 정신 질환에 이를 수도 있다.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그야말로 몸이 녹슬어 죽는다.

세포 안에 든 철이 자유롭게 움직이면 생체 고분자들이 1차 공격 지점이 된다. 화학적으로 녹슨다는 말은 철이 전자를 산소에 준다는 뜻이다. 전자를 받은 산소가 곧 활성산소다. 이 물질은 세포막이든 핵 안에 든 유전자든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결국 세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채 60년 못 미치는 생애 동안 베토벤이 줄곧 겪었음 직한 생화학적 사건들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이라도 알코올과 철은 그의 간을 달달 볶았음이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최근 몇년간 혈색증 환자가 청력을 잃는 경향이 있다는 임상 소견도 보고되었다. 철은 꼭 필요하지만 많으면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이 혈색증 환자에게서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연구를 수행한 뉴욕 시나이 병원 샤론 모알렘은 혈색증이 유럽계 코카시안에게 무척 흔하다고 말했다. 서유럽 후손 200명 중 한 명은 혈색증 증세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왜 유럽인들은 명백히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런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었을까? 진화학자들은 혈색증 환자가 세균 감염에 더 내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에 좀 더 강했으리라는 것이다. 세균의 생존에 필수적 영양소인 철을 악착같이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토벤의 조상들은 페스트균에게 내주지 않았던 철을 후손인 악성(樂聖)의 몸에 고즈넉이 남겼다. 할(喝)!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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