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외교부 지나다 기념사진 찍으면 ‘간첩’ 될 수 있다
1953년 3월5일, 스탈린이 죽었다. 후임자 흐루쇼프의 표현에 따르면 ‘피비린내 나는 시대가 끝났다’. 1922년부터 1953년 사망 전까지 약 30년 동안 옛소련을 ‘철권통치’한 스탈린은 생전에 ‘빛나는 태양’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빛나는 태양’ 아래 살았던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적 인간)들은 밤마다 내무인민위원부(NKVD·스탈린 시대에 온갖 정치적 숙청을 기획, 실행한 비밀경찰)가 자기 집에 들이닥칠까 노심초사했다. 무사히 아침에 눈떠도 간밤에 ‘사라진’ 이웃들 소식에 다시 한번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내무인민위원부의 ‘습격’을 걱정한 이는 힘없고 ‘빽’ 없는 일반 민중만이 아니었다. 스탈린과 함께 최고 권력을 누린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도 매일 밤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특히 스탈린의 수족이 되어 소비에트연방 내에 ‘숨어 있는’ 모든 ‘인민의 적’과 ‘제5열’(내부에 침투한 첩자로, 스페인 내전에서 유래했는데 스탈린이 즐겨 쓴 표현)을 색출해 ‘제거’하는 일을 도맡은 내무인민위원부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가장 기뻐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는 바로 그 베리야에 관한 이야기다. 다소 코믹한 영화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절대 웃을 수 없는 이야기다.
베리야의 조롱, 흐루쇼프의 복수
영화 서두에 스탈린과 함께 저녁 만찬을 즐기는 핵심 중앙위원들의 모습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스탈린 사후 후계자가 된) 당시 중앙위원회 제1서기 흐루쇼프는 연신 보드카를 마시며 스탈린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온갖 익살을 떨고 ‘바보짓’도 서슴지 않는다. 베리야는 그런 흐루쇼프의 바지 주머니에 토마토를 넣어 으깨는 장난을 치며 흐루쇼프를 대놓고 조롱한다. 스탈린은 그런 그들을 보며 담배 파이프를 문 채 깔깔 웃고, 다른 중앙위원들도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려 온갖 재담을 떤다. 중앙위원은 모두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생살여탈권을 쥔 권력의 최상위층이었지만, 그들의 생살여탈권은 스탈린에게 달려 있었다.
미국 정치학자 마크 로런스 슈라드가 쓴 책 <보드카 정치: 술과 독재, 그리고 러시아 국가의 비밀역사>에도 스탈린이 보드카를 그의 공포통치에 어떻게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재밌는 일화가 소개됐다. “스탈린은 자신의 담뱃대를 청소하는 도중에 연기가 나는 담뱃대로 흐루쇼프의 벗어진 머리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 늙고 키 작은 농민 출신의 ‘궁정 광대'(흐루쇼프 별명)에게 보드카를 연신 마시게 한 다음 그에게 무릎을 꿇고 추는 우크라이나 민간 전통춤을 춰보라고 명령했다. (…) 비밀경찰 수장인 베리야는 가끔 그의 외투 뒷면에 ‘멍청이’라는 글자를 붙였는데, 흐루쇼프는 주변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 스탈린은 항상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술을 이용해 핵심 권력 그룹의 균형을 깨뜨렸다. 그는 가장 가까운 동지들(또는 잠재적 라이벌)에게 술을 과도하게 마시게 하여 그들의 진심을 파악하고,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게 했다.”
스탈린에게 잘못 걸려들어 ‘제5열’로 찍힌 사람들은 베리야에게 ‘제거명단’으로 전달됐고, 베리야는 즉각 그들을 ‘제거해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그런 베리야도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이제는 ‘평화와 소시지’의 시대가 왔다고 웃었다. 스탈린의 충실한 ‘살인청부업자’ 노릇을 했지만 베리야 역시 자신도 언제 전임자들처럼 ‘첩자’ 누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숙청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이 죽은 뒤 가장 먼저 체포돼 ‘제거됐다’.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끌려가다 뒤에서 총살당한 베리야의 죄명은 놀랍게도 ‘조국을 배신하고 외국 세력과 결탁한 첩자’였다. 베리야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늙고 키 작은 ‘궁정 광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수법을 이용해 그를 ‘제5열’로 찍어 제거해버린 것이다. 영화 속에서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처형하고 난 뒤 “등신 같은 놈!”이라고 욕했다. 자신이 당한 모욕을 되돌려주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스탈린은 소련 내에 살던 고려인과 중국인, 폴란드인 등 여러 소수민족을 국가 비상상황이 일어나면 언제든 조국을 배신할 준비가 돼 있는 ‘잠재적 첩자’로 분류했다. 이들 소수민족은 스탈린 대숙청 기간에 집중적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공동주택과 공원, 직장 등 모든 곳이 다 첩자들이 은신했다고 의심되는 장소였다.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문틈 사이로 자기 말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집 안에서도 서로 ‘속삭이듯’ 말해야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우울했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매일 보드카를 들이부어야 했다. 스탈린은 ‘제5열’을 가려내기 위해 보드카를 마셨고, 사람들은 ‘제5열로 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보드카를 마셨다.
잠잘 때 영어로 잠꼬대하면
주변 사람들을 좀체 믿지 않고 의심이 많았던 것은 마오쩌둥도 스탈린 못지않다. 상황만 다를 뿐, 저 앞의 문장을 중국 마오쩌둥 시기로 바꾼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오는 1930년 자신의 혁명 근거지인 장시에서 ‘AB단 사건’(반볼셰비키 연합)을 조직해 대대적인 내부 ‘첩자’를 가려내는 운동을 전개했다. 중국판 ‘제5열’ 색출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마오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개인을 제거하기 위해 ‘첩자’를 활용했다.
홍군이 장악한 장시 소비에트 근거지에 국민당과 일본 등이 심어놓은 온갖 첩자가 활개 치고 있다고 했다. ‘특무’(첩자)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여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AB단 사건’은 나중에 홍군이 장악하던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 혁명가가 대부분이던 만주 지역에도 불어닥쳤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와 항일 운동가를 ‘첩자’ 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아넣은 ‘민생단 사건’도 ‘AB단 사건’의 연장선이었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김산(장지락)도 당시 중국의 베리야 같은 존재이던 캉성의 지시로 일본 첩자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했다.
1949년 신중국 건설 이후에도 마오는 여전히 스탈린처럼 ‘첩자 색출’에 몰두했다. 1976년 그가 죽을 때까지 한 일은 대부분 ‘인민의 적’과 ‘계급의 적’ 그리고 ‘특무’를 적발하는 각종 정풍운동과 군중운동이었다. 그 정점이 문화대혁명이다. 문혁 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죄명 중 하나는 특무로 찍히는 것이었다. 잠잘 때 잠꼬대로 영어를 한마디만 해도 ‘미제국주의 특무’라는 증거가 되어 붙잡혀갔다.
대만이나 미국 등 외국에 가족이나 친척이 거주하는 사람도 특무라는 의심을 받았다. 미국 등에서 유명 대학을 나오고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신중국 건국 뒤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문혁 기간에 ‘미제 첩자’로 몰려 개죽음을 당한 일도 많았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헤이룽장성의 한 국경마을 주민들은 문혁 기간에 떼로 특무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곳에는 중-소 혼혈아가 많았고 국경을 수시로 넘나들며 인근 소련 주민들과 교류도 많았는데, 문혁이 일어나자 하루아침에 ‘소련 첩자 마을’로 둔갑했다. 스탈린 사후 중-소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련 특무’라는 꼬리표도 생겨났다.
“지금이라면 종신형 받거나 죽었을 것”
“시진핑 체제가 시작한 뒤인 2013년, 나는 구치소의 철제 취조실에 매일 갇혀 중국 공안국 소속 경찰들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의 KGB라고 할 수 있는 국가안전부 소속 심문관들이 찾아와 내가 간첩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들은 미세한 빗으로 내 노트북을 샅샅이 뒤지면서 “당신은 신장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죠. 이 보고서를 봐요”라며 으르렁대듯 소리쳤다. 나는 대답했다. “제가 안 썼습니다.” “하지만 당신 노트북에 있잖아요!” 그가 소리쳤다. 나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이는 공개적으로 이용 가능한 뉴스를 분석했을 뿐입니다. 제 동료가 고객을 위해 쓴 비즈니스 리포트입니다. 신장의 비즈니스 위험성을 분석한 뒤 우리 웹사이트에 게시했습니다.”
2023년 5월24일치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실린 글이다. 이 기사를 쓴 피터 험프리는 <로이터> 특파원으로 일했고, 중국에서 15년간 주로 서구 기업들을 대상으로 중국 기업 관련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불법 정보 수집 혐의로 2년간 감옥에 갇혔고, 그의 아내도 같이 수감됐다. 기사에서 험프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지금 잡혔더라면 20년형 또는 종신형을 받거나 죽었을 것이다.”
2023년 7월1일부터 중국은 새로 확대 개정된 ‘반간첩법’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이 법에 따르면 기존 ‘간첩행위’의 정의가 확대되고, 법 적용과 국가안보기관의 권한도 대폭 확대된다. ‘기밀 정보 및 국가안보와 이익에 관한 문건, 데이터 등에 대한 정탐과 취득, 매수 및 불법 제공을 간첩행위에 추가하고 국가기관과 기밀 관련 부처, 핵심 정보 기반시설 등에 대한 촬영, 사이버 공격, 그리고 간첩 조직 및 그 대리인에게 협력하는 행위도 간첩행위에 추가한다’고 적시했다.
험프리가 만일 2023년 7월1일 이후에도 2013년과 똑같은 중국 기업 관련 ‘공개자료’를 이용하거나 게재하는 일을 했다면 그는 ‘중대 간첩’이 될 수 있다. 내가 만일 베이징 외교부 앞을 지나가다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해도 ‘재수 없으면’ 국가 기밀 관련 부처를 촬영한 ‘간첩’이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제5열’로 간주하던 스탈린처럼 ‘국가 기밀, 국가 안보와 이익’에 대한 해석의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반국가단체’로 살아오는 망령
물 건너오는 뉴스를 보니, 한국에서도 ‘간첩’ ‘반국가단체’ 같은 구시대의 언어가 귀환하는 듯하다. 사회주의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똑같이 ‘간첩’을 거론하고 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죽었지만’ 간첩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일까. 죽은 베리야도 부활해야 할 것 같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박현숙의 북경만보: 베이징에 거주하는 박현숙씨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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