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R&D 예산 재배분 소동을 보며
갈라먹기라면 나눠준 정부 실패
기재부·혁신본부는 왜 말이 없나
국제협력, 보완자산 있어야 가능
정부출연硏 미션 주고 개혁해야
'선진국 콤플렉스' 깨야 선진국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인공지능(AI) 암흑기일 때 정부가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개발(R&D)을 지원했다.” 대통령 일행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제프리 힌튼 토론토대 교수가 한 말이다. 대통령실은 “AI 강국 캐나다의 성공 요인이 안정적·장기적 투자에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미국 같은 국가마저 포기하는 상황에서 캐나다처럼 정부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연구를 지원할 수 있을까. 정권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R&D 예산 재배분 소동이 벌어지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대통령실 주장대로 정부 R&D 예산을 갈라먹기·나눠먹기 하는 관행이 기득권의 부당이득이라면, 이게 어디서 비롯됐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현상적 원인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 시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권 카르텔이라면 그 자체로 심각한 담합이요, 범죄다. 관련 조직을 해체하고 관계자들을 문책해야 할 일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부 연구비를 받은 과학기술계만 죄인처럼 내몰리는 형국이다. 갈라먹기·나눠먹기로 예산을 배분해준 기획재정부와 과학기술혁신본부는 말이 없다. 정부 R&D 예산을 가장 많이 집행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도 묵묵부답이다. 부처와 관료의 유체 이탈에 말문이 막힌다.
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배분하겠다면 방향성·전략성이 먼저 나와야 한다. 번갯불에 콩 볶듯 해치우는 어떤 재배분도 또 하나의 갈라먹기·나눠먹기가 되고 만다. 세계 최고 연구기관 및 연구자와 국제협력을 확 늘리라는 대통령실 지시만 해도 그렇다. ‘외교를 위한 과학(science for diplomacy)’과 ‘과학을 위한 외교(diplomacy for science)’는 서로 다른 얘기다. 만약 연구를 위한 국제협력이라면 돈으로만 되지 않는다. 국제 공동연구가 비슷한 수준에 있는 국가끼리 폐쇄적으로 이뤄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상호 보완적 연구자산(complementary asset)이 있기 때문이다. 보완적 자산이 없으면 공동연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냉혹한 국제 현실이다. 동맹국조차 믿지 못하는 안보경제 시대엔 더 말할 것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해외에서 들어오는 R&D 투자가 매우 낮다. 밖에서 볼 때 R&D 협력에 매력적이지 않은 한국이 돈을 내민다고 바로 응할 세계 최고 연구기관이나 연구자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선진국에 사람을 보내 배워오자는 전략은 1960년대 방식이다. 지금 같은 기술 보호주의 시대엔 통하지도 않는다. 해외 한인 과학자를 말하지만 나눠먹기·갈라먹기의 확장판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기술유출 분쟁이 일어날 소지도 있다. 국가 간 연구관리 및 성과배분 시스템도 다르다. 상호 협의해 공동연구를 해도 정권이 바뀐 후 국내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가 들이닥치면 과학기술자만 다친다. 국제협력을 하려면 상대와의 깊은 교감과 신뢰, 치밀한 사전 전략, 그리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가 요구되는 이유다.
정부출연연구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예산을 낭비한다는 지적은 나올 수 있다. 여기서도 분명히 짚을 게 있다. 그동안 출연연을 누가 경영했나. 출연연이 실패했다면 임무를 제대로 주지 못한 정부, 예산과 인력을 통제해온 정부 책임이다. 개혁은 필요하다. 출연연 내부에서조차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출연연에 분명한 임무를 주라. 그에 따라 개혁을 하는 게 순서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책임만 떠넘기는 정부는 비겁하다.
연구자가 정부 연구비로 ‘할 수 있는 연구’만 한다는 비판도 그렇다. 이 역시 구조적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실패하면 불이익을 받는 환경에서 도전적 연구에 나설 바보는 없다. 선진국이 하지 않는 연구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연구만 하도록 제도를 만들어놓고 연구자만 다그치는 꼴이다.
연구자가 왜 ‘퍼스트 무버’이고 싶어 하지 않겠나. 중국도 미국도 겁내지 않는 연구자가 많다. 21세기의 4분의 1이 다 돼 가는 지금도 강대국 콤플렉스와 추종자 프레임에 갇혀 있는 정부가 문제다. R&D 예산 문제 제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적·합리적·과학적 절차를 통한 제도 개혁이다. 이것을 못 해내면 소동은 소동으로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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