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시민 참여 정치의 승리
[왜냐면] 이필우 | 경기 고양시민
지난 6월 경기 고양시에서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골프장을 증설하는 사안이 시청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시 대곡역 뒤쪽엔 산황산이 있다. 산황산은 녹지 공간이 적은 고양시에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 같은 산이다. 2008년 산황산 일부에 9홀짜리 골프장이 들어섰고, 2011년 골프장 사업주가 18홀로 증설을 계획하면서 산황산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로부터 산황산을 지키고자 하는 지역 주민과 환경 단체들이 골프장 증설을 반대하고 산을 보호하고자 싸워온 세월이 10년이다.
골프장 증설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증설되는 골프장은 개발제한구역 안에 있다. 불과 294m 떨어진 곳에 107만 고양 시민과 파주 운정‧교하 시민의 식수원인 고양 정수장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골프장의 야간 조명은 인근 주민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골프장 유지를 위한 농약 살포는 생존의 위협이 된다. 날아오는 골프공도 문제고,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이 뛰어노는 자연환경을 골프장 증설로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훼손된 자연은 다시 복구되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어떻게 하면 녹지 공간을 더 확보하고 훼손된 자연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나마 남은 자연까지 훼손하면서 왜 개인의 이익, 소수의 특권만을 허용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7월2일은 골프장 환경영향평가 시한 만료일이었다. 사업자는 사업승인인가를 받기 위해 신청서를 급박하게 제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심정이었지만,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했다.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 시도의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역의 각 당 정치인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 달라고 요구하는 문자와 내용증명을 보냈다. 이 사안에 대해 인가권을 가진 고양시장을 비롯한 관련 공무원들이 이 문제의 엄중함을 깨닫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항의 방문, 시장 면담 요청, 시청 앞 기자회견, 비박 농성 등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일은 많은 시민이 이 사안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공유해 나가는 것이었다.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1인 시위와 문화제를 열었다. 몇몇 사람이 모여 시작한 산황산 지키기 운동은 한 사람씩 띠를 이어 여러 사람으로 들풀처럼 번져나갔다. 모든 시위는 결연했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진행했다. 우리의 일이었고 모두를 위한 일이었지만 몰라서 무심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는 시급한 일이었다. 시청을 방문하고 호소하는 과정에서 바위처럼 단단한 공무원들의 태도를 대할 때 많이 무너지고 좌절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결국 고양시청으로부터 ‘골프장 변경 신청 사항에 대해 미수용’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아주 오래간만에 맛보는 자발적 시민 참여 정치의 승리였다. 눈물이 났다. 지킬 수 있는 걸, 지켜내야만 하는 걸 지켜내지 못하고 살았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개발로 갈등을 빚는 곳이 많다. 시민의 노력과 운동으로 산황산을 지켜낸 고양시의 사례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민주정치는 시민에 의해 꽃이 핀다는 사실을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금 깨달았다. 약자들은 ‘승리의 역사’보다는 ‘피와 눈물의 역사’를 남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뒤돌아보면 약자들의 피와 눈물로 일궈낸 기록의 역사 속에서 진일보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오래도록 지키고 보존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누리고 함께할 때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지금도 그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는 국민의 공공성을 보장하고 정의로와야 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아야 한다. 검찰은공공성과 정의를 해치는 권력, 자본, 세력들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시민은 꺼지지 않는 들불처럼 좌절하지 말고 연대해야 한다.
산황산 자락에는 700살 느티나무가 있다. 이성계의 명으로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던 무학대사가 이곳을 눈여겨보고 세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두 그루는 죽고 살아남은 나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나무다. 하마터면 700살의 생명과 역사도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릴 뻔했다. 혹시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잘 모르겠거든 산황산 아래 700살 어르신, 느티나무에게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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