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책을 500권이나 쓴 이유? 애국심이죠”

강성만 2023. 7. 12.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짬]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학을 말하다>에서 다산을 아낀 정조의 통치술도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지금 통치자들도 배울 게 많아요.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나 그들이 바깥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전해주길 원했죠. 규장각을 만들어 인재양성에도 힘썼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애국심이죠.”

내년이면 설립 20년이 되는 다산연구소 이사장이자 다산 전문가인 박석무(81) 우석대 석좌교수에게 다산 정약용(1762~1836)이 500권 넘는 저술을 남긴 가장 큰 원동력이 뭐냐고 묻자 나온 답이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을 두고 ‘한국에서 한문으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라고 쓴 바 있다.

“다산은 그가 살던 조선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라다운 나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책으로 끊임없이 책을 썼어요.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자신의 글을 보고 나라를 개혁하길 바라는 마음이 매우 컸어요. 다산이 두 아들에게 ‘내 제사를 안 지내도 되니 꼭 내 책은 전해져야 한다’고 당부한 것도 그 때문이죠. 제가 지금 하는 활동이 다산의 그런 걱정을 덜어주는 일입니다.”

최근 <다산학을 말하다>(현암사, 전 2권)를 펴낸 박 이사장을 지난 10일 서울 사당동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각각 ‘다산의 마음을 찾아’(1권), ‘다산의 생각을 따라’(2권)라는 부제가 달린 이 저술은 박 이사장이 2004년 연구소를 열고 1200회 이상 써온 인터넷 칼럼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를 간추려 모았다. 그는 지금도 신문 3곳 등 모두 5개 매체에 매달 다산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칼럼을 쓰고 있다.

<다산학을 말하다 1> 표지.

1권은 다산이 쓴 시, 다산과 정조의 만남 그리고 다산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다산이 스승으로 여긴 인물들에서 주로 칼럼의 소재를 찾았고 2부는 <논어> 등 유학 경서에 대한 다산의 해석과 다산의 대표 저작인 <목민심서>를 비중 있게 다뤘다.

그는 1200회나 되는 칼럼 소재를 찾기 위해 다산의 책에서 현시대와 접목할 수 있는 내용을 샅샅이 훑었단다. 이번 책이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학의 전모를 보여준다고 그가 자부하는 이유이다. “<목민심서>와 다산의 편지가 칼럼에서 많이 거론되었죠. 반면, 다산의 예론이 담긴 <상례> 같은 책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요즘 시대와 맞지 않아 거의 다루지 않았죠.”

먼저 이번 책의 가장 앞자리에 놓인 다산의 시에 대해 물었다. 1960년대 북한 학자 신구현은 다산을 ‘시의 성인’ 즉 ‘시성’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박 이사장도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고 했다. “저는 다산이 당이나 송시를 본뜨지 말고 ‘조선의 시를 짓자’고 한 점을 높이 봅니다. 다산은 민중의 고통을 묘사한 여러 시에서 보듯 리얼리즘에 철저했을 뿐 아니라 서정시도 탁월했어요. 정조도 다산 시를 보고 여러 차례 ‘기재로다’며 감탄했죠.”

율곡 이이나 오리 이원익 등 다산이 높이 평가하거나 스승으로 여겼던 인물들을 다룬 글들은 인간 다산의 참모습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남인 당파였던 다산은 젊은 시절 정조에게 올리는 글에서 같은 남인인 퇴계보다는 다른 당파인 율곡의 성리학설이 옳다는 주장을 펼쳤단다. “다산은 누구와도 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을 가리지 않았죠. 그 시절엔 당이 다르면 옆집 사람과도 대화를 안 했어요. 하지만 다산은 노론으로 당이 다른 김매순, 홍석주와 활발히 학문적 토론을 했죠.”

19년간 1200여회 써온 칼럼 간추려 최근 ‘다산학을 말하다’ 1·2권 펴내 “당·송시 본뜨지 않은 ‘조선 시’ 짓고 이론·실천 하나로 본 지행합일 위대”

70년 ‘흠흠신서’ 첫 인연 뒤 다수 저작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베스트셀러 “‘내 책 전하라’는 다산 유언 따른 활동”

다산의 글에는 국가 경영뿐 아니라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내용도 많다. 그중 가장 귀한 것을 하나 꼽아달라고 하자 박 이사장은 “한자로 정성 성(誠)”이라고 답했다. “다산은 학문이든 정치든 모든 것을 정성스럽게 하라고 강조했어요. 성을 집중적으로 논의한 경서 <중용>을 다산이 중시한 것도 그 때문이죠. 말을 바꾸지 말고 속이지도 말고 진실되게 하라는 게 다산의 뜻이었죠. 다산은 28살에 대과에 급제하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밝히면서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라고 했어요. 공(공공성)과 염(청렴)의 실천에 온갖 정성을 다 바치겠다는 거죠.”

그는 다산의 위대함 중 가장 큰 것은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본 점이라고 했다. “지행합일이 바로 다산의 철학입니다. 이론만으로는 안 되고 그걸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상이죠. <논어> 첫 대목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을 두고 주자는 새가 날갯짓을 연습하는 거로 봤지만, 다산은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했죠.”

그는 다산이 지행합일을 실천한 대표적인 예로 곡산 부사 시절에 관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저항하다 체포령이 떨어진 농민 이계심을 무죄 석방하면서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다”고 오히려 치하한 점을 들었다. “다산은 ‘상관의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한다’는 앎을 목민관 때 직접 행동으로 옮겼죠.”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네 차례나 치른 박 이사장과 다산의 인연은 1970년 전남대 법대 대학원 1학년으로 올라간다. “한문을 잘하니 우리 법제사를 연구하라”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다산 책 <흠흠신서>를 본 게 다산 저작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박 이사장은 수십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1979)를 비롯해 다산 관련 책을 여러 권 냈고 <흠흠신서>와 다산 시와 산문을 우리말로 옮겼다.

어릴 때 유학자인 조부에게 한문을 배운 그는 지금도 율곡 저술인 <격몽요결>을 모두 외운단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초등 2학년이었어요. 그때 학교가 폭격으로 불타 집에서 1년 동안 조부에게 집중적으로 한문을 배웠어요. 제 인생을 바꾼 시간이었죠. 그 뒤 광주에서 중·고교를 다닐 때도 주말이면 무안 집에서 조부와 사서삼경 내용을 두고 토론했죠.”

그의 삶의 지향점 역시 다산 사상과 녹두장군 전봉준의 행동을 합한 ‘다사녹행(茶思綠行)’이다. “전봉준은 다산에 이어 제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죠. 민중 사상을 직접 행동으로 옮긴 분이잖아요.”

그는 지금도 민주화 원로로서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고 있다. 올해 초 함세웅 신부와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등이 구성한 ‘비상시국회의 추진위원회’ 결성을 처음 제안한 이도 그였단다. “다산이 강조한 공정을 윤석열 대통령은 입으로만 말하고 있어요. 검찰 수사를 보더라도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고 있잖아요.”

인터뷰 말미에 도대체 왜 다산을 50년 이상 붙들고 있는지 물었다. “제가 찾았던 사회나 국가 개혁을 위한 지혜를 다산의 책에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어서죠. 그 어떤 책도 다산 저술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다산학에는 공자나 맹자는 물론 율곡, 퇴계 그리고 실학자인 반계나 성호의 사유까지 다 있어요.”

계획을 묻자 이런 답이 나왔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강의와 칼럼을 통해 다산의 훌륭한 생각을 알려야죠.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애국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