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는 민생 범죄” 칼 빼든 사법기관...양형 기준도 바꿔
검찰은 ‘범죄단체조직’ 혐의도 적용
대법원 양형위, 내년쯤 새 양형기준 초안 만들 듯
“근본적 해결책 안 된다” 지적도
빌라 전세 보증금 183억원을 가로챈 ‘세 모녀 전세사기’의 주범 김모(58)씨가 12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다수의 피해자가 있는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징역 15년)엔 못 미치지만, 검찰이 구형한 형량이 그대로 인정되며 중형이 선고됐다.
법조계에서는 앞으로 전세사기 피고인이 중형을 선고 받는 사례가 점차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전국에서 대규모 피해가 잇따르자, 검찰과 법원이 전세사기 범죄를 과거에 비해 엄격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민생 범죄를 ‘엄중 처벌’하고 끝낼 게 아니라 입법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검찰 구형보다 높은 형량도, 법정 최고형도 나왔다
전세사기는 형법상 사기죄를 적용 받는다. 형법 제347조 1항은 “사람을 기망해 재물을 받거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한 사람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피해자가 여러 명일 때는 경합범이 돼 최고형의 2분의1(5년)을 가중한 징역 15년형이 가능하다.
법조계에 따르면, 과거에는 전세사기 피해자가 많아야 열댓 명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더라도 일시적 자금 융통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세모녀 전세사기나 ‘빌라왕’ 사건처럼 피해자가 수백명에 달하는 사례가 늘자, 이들이 피해자들을 고의적으로 기망해 사기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A판사는 “전세 피해 규모나 유형이 이전과 다르다 보니 재판부의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라며 “피해 금액이 수십억원을 웃도는 전세사기 사건이 많아지고 세입자 피해도 커지면서 전세금 미반환에 고의성이 있다고 볼 여지가 커졌다”고 말했다.
사법부가 전세사기 범죄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분위기는 최근 여러 차례 감지됐다. 지난 4월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이른바 ‘깡통전세’ 임대차 계약을 체결해 31명으로부터 70억여원을 가로챈 일당에게 각각 징역 8년, 6년, 5년형을 선고했다. 이는 검찰이 구형한 것보다 1년씩 높은 형량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은 서민층과 사회초년생들의 삶의 기반을 흔든 중대한 범행”이라고 질타해 눈길을 끌었다.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이 선고된 사례도 있다. 작년 11월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2016~2019년 경기 광주 일대에서 110명을 상대로 120억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부동산 임대 회사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9억9400만원의 추징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에서 피고인은 “부동산 시장의 변화와 예상치 못한 이유 등으로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범행의 고의성을 인정했다.
◇전세사기 사건 ‘범죄단체 조직 혐의’ 첫 적용한 검찰…새 사기 범죄 양형기준, 내년 구체화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사기 범죄의 양형 기준을 12년 만에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세사기 등 조직적 사기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현재 조직적 사기 범죄의 기본 양형 기준은 피해액이 1억~5억원일 때 징역 2~5년, 피해액 5억~50억원일 때 징역 4~7년, 피해액 50억~300억원의 경우 징역 6~9년이다. 이 기준을 토대로 감경요소와 가중요소를 따져 형량을 결정하고 있다. 새로운 양형 기준은 내년쯤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양형위 관계자는 “기존 양형 사례 조사부터 기초 연구 검토를 거쳐 (양형 기준) 초안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전세사기 판결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 조사하는 단계다. 이 관계자는 “전세사기 뿐 아니라 보이스피싱 등 조직적인 사기에 양형 강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 (사기를) 양형 기준 수정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검찰 역시 전세사기 범죄를 과거보다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 사기 수법이 계획적일 경우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겠다고 공언하는 한편, 피해자의 전세금 마련 경위 및 피해자 재산에서 전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구형에 반영하고 피고인의 은닉 재산을 추적해 피해자의 회복을 지원하겠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부장검찰 출신인 김윤후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검찰이 전세사기를 과거보다 전향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법무부도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적극적으로 인지수사도 하면서 관계 부처와 협력 체계를 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6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일당 35명을 기소하면서 소위 ‘바지 임대인’,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 등 18명에 대해 범죄단체조직 혐의를 적용했다. 전세사기에서 범죄단체조직 혐의를 적용한 첫번째 사례다. 그만큼 검찰의 의지가 강하다는 걸 방증하는 예다.
전문가들은 전세사기에 대한 수사 기관의 적극적인 대응과 양형 준 강화도 의미가 있지만 예방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대규모 피해자가 발생하고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을 ‘엄중 처벌’로 마무리 짓기보단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관계 부처에서 법률을 개정해 피해를 예방하고 양산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는 사법보다는 정책의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A판사 역시 “전세 사기를 비롯한 범죄 유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입법부에서 발 빠르게 법을 개선해야 사법부도 그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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