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충돌의 여왕’ 김영기 석좌교수 “세계적 연구는 ‘시간’이 만든다”
120년 역사 美 물리학회 첫 아시아인 회장
“美는 수십년짜리 기초과학 연구에 계속 투자”
“韓도 노벨상 위해서는 장기투자로 스텝업해야”
“기초과학 연구는 어찌 보면 마라톤과 같습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장기간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을 때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거든요. 급하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면 연구가 잘 되기 어렵습니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 세계 한인 과학기술인 대회 현장에서 만난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석좌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실험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쌓으며 ‘충돌의 여왕(Collision Queen)’이란 별명을 얻었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물리학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회장 자리에도 올랐다.
김 교수를 입자물리학의 세계로 이끈 건 수학에 대한 관심과 재미였다. 커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집안의 강요나 압박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고려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이후에는 2학년까지 탈춤과 학생운동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3학년이 돼서야 입자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해 고려대에서 석사,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김 교수는 “뭔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별 고민, 압박 없이 마음 가는대로 했던 게 나의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해야 할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것을 학계에 종사하며 수도 없이 봐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재 프랑스와 스위스 사이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3000여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우주의 탄생을 함께했던 입자를 찾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입자가속기 LHC는 둘레 27㎞로 인류 역사상 제일 거대한 실험장치로 통한다.
-전공인 ‘입자물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설명 부탁드린다.
“간단히 말하면 만물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학문이다. 만물이란 우리 인간을 비롯해 지구는 물론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 입자들을 찾아내는 것에 더해 각각의 입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한 끝에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체들이 만들어진 건지를 탐구한다. 자연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입자를 어떻게 찾아내나.
“물질을 이루는 단위 중 하나가 흔히 아는 원자다. 원자는 일종의 양파와 같은 존재다. 원자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면 그 안에 전자와 핵이 있고, 핵 안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고, 거기서 더 들어가면 쿼크라는 입자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 장치가 ‘입자가속기’다. 긴 터널처럼 생긴 입자가속기에 입자들을 넣고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서로 충돌하게 만든다. 그러면 입자가 깨지면서 파편이 나오는데, 아무리 충돌시켜도 더이상 파편이 나오지 않는 입자, 즉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 알갱이를 찾는 것이 입자물리학의 주요 목표다.”
-어쩌다 입자물리학을 하게 됐나.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해서 재밌게 공부하다가 고려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사실 그 이후에는 공부를 좀 게을리 했다. 탈춤 동아리에서 2년동안 열심히 놀았다. 그러다 어쨌든 졸업은 해야 하니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물리를 잠깐 쉰 건데 오랜만에 하니 더 재밌었다. 그래서 졸업 후 취업보다는 공부가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원까지 가게 됐다.”
-여성이 과학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집안 반대는 없었나.
“가족이 6남매고 내가 다섯째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한테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건지, 내가 뭘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또 집이 경상북도 경산 촌동네였는데 부모님이 항상 하던 말이 공부해서 농촌을 벗어나라는 거였다. 마침 좋아하는 게 수학이었고 대학 갈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전혀 집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덕분에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낼 수 있었다.”
-박사 과정 때부터 계속 해외에서 지냈는데 차별 문제는 없었나.
“없었다고는 못한다. 아시아인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차별이 분명 있었다. 따지고 보면 차별인데 내가 느끼지 못한 것들도 있을 거다. 근데 사실 내 성향상 그런 걸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부정적인 인식이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린다. 그런 점이 여기까지 오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괜한 고민 없이 앞만 보고 전진하는 태도가 중요한 건가.
“물론이다. 다만 연구자들이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면 주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연구 활동은 하나의 긴 문제를 마라톤처럼 조금씩 풀어나가는 과정이다. 데드라인을 빡빡히 잡고 연구자들을 압박하면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연구자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건가
“연구자들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한다. 급하게 성과를 내라고 계속 닦달하면 될 것도 안 된다. 연구직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사람이 성실하다는 증거가 된다. 느긋하게 사고하고 이를 연구에 반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나.
“모든 연구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뭘 해도 안 풀릴 때가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쉬었다. 나가서 걷던지, 다른 활동을 하던지, 아니면 주변 동료들과 천천히 대화를 하면서 해결책을 생각해보던지. 그러고 다시 돌아오면 단순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 넘어 시야가 트인다. 막혔을 때 보이지 않던 돌파구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연구계와 한국 연구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기초과학이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기초과학 쪽에 더 많은 지원이 들어간다. 물론 R&D에 쓰는 자금 규모가 전체적으로 미국이 크겠지만 비율로 따져도 미국은 기초과학에 많은 지원을 넣는다.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보면 한 분야를 수십년씩 연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한국 시스템에서 수십년짜리 연구를 한다는 건 어렵다. 그런 장기적인 연구에 지원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큰 폭의 스텝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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