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어도 OK” 문턱 낮춘 日도서관… 낡은 도시 살린다
9일 오후 일본 도쿄도(都) 다마(多摩)시 다마 뉴타운. 도쿄도청이 있는 도쿄 부(副)도심 신주쿠에서 30km가량 떨어져 있는 일본 수도권 대표 신도시다. 낮 최고기온이 32도를 넘는 더위에 비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신도시 중심부 중앙공원 새 건물은 가족 단위 인파로 붐볐다. 열람실 의자가 모자랄 정도였다. 이달 1일 새롭게 문을 연 다마 시립 중앙도서관이다.
언뜻 보면 한국의 평범한 지역 도서관과 비슷하지만 기존 도서관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도서관 안에서 수다를 떨어도 되고 아이가 뛰어다녀도 괜찮다. 휴대전화 통화도 할 수 있고 스터디그룹 토론을 해도 된다. ‘도서관=정숙’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배경에는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 일본 지역사회 고민과 나름의 해법이 녹아 있다.
엄마가 그림책 읽어줘도 ‘OK’
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 이제 갓 말이 트였을 것 같은 꼬마가 엄마한테 책을 읽어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딱히 목소리를 낮추거나 속삭이지 않고 평소 집에서 하듯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한쪽에서는 책을 고른다면서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 부모한테 집에 돌아가자고 떼쓰는 아이도 보였다.
다른 ‘평범한’ 도서관이었으면 당장 다른 이용자나 사서에게 주의받을 상황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눈총을 주지 않는다. 남이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100m 달리기 시합하듯 뛰는 게 아니면 ‘OK’다. 평범한 수준의 ‘생활 소음’은 이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허용된다. 커피와 과자를 파는 매점도 딱히 열람실과 벽 등으로 구분 짓지 않았다. 매점에서 파는 아메리카노향이 열람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요코쿠라 다에코(横倉妙子) 도서관장은 “일본 도서관은 주로 어르신들이 와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며 “도서관의 매력을 높여 연령대와 상관없이 가족 이용자, 특히 어린이가 언제라도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도서관 전체가 시끄러운 건 아니다. 2층은 아이들이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 수준에서 떠들 수 있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니 여느 도서관 못지않게 정숙한 분위기다. 유리벽으로 나뉜 별도 공간은 ‘이어폰은 소리가 새 나갈 수 있으니 삼가 달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낡은 신도시, 도서관도 늙어가
중산층의 터전이던 다마 뉴타운은 경제 성장이 꺾이며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된 1990년대부터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조성 초기에 입주한 시민들은 거품경제 붕괴로 집값이 하락하고 나이를 먹게 되자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입주 당시 부모를 따라온 자녀들은 독립하면서 자연스럽게 떠났다. 새로 가족을 일군 젊은이들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40년 된 저층 아파트 대신 도심의 화려한 초고층 아파트를 선호했다. 1989년 5% 수준이던 다마시 인구 대비 65세 이상 고령자 비중은 지난해 31.9%까지 높아졌다. 일부 공공임대 아파트 거주자 고령화율은 60%를 넘을 정도였다. 뉴타운이 아니라 ‘올드 타운’이라는 자조가 터져 나왔다.
낡아가는 도시에서는 도서관마저 늙어 갔다. 폐교한 중학교 건물에 들어선 기존 시립 도서관은 구석진 골목과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야 해 접근성이 떨어졌다. 일부 나이 든 이용자들은 조금만 소음이 나도 “도서관에서 왜 떠드냐”고 민감해 했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기 어렵다’ ‘가족끼리 도서관에 가면 민폐가 된다’는 말이 나왔다. 2021년 시립 도서관 책 대출자 연령대를 조사해 보니 60대 이상이 절반을 넘었고 10대는 4.2%에 불과했다.
‘떠드는 도서관’으로 문턱 낮춰
다마시는 시립 도서관을 새로 단장해 뉴타운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했다. 노인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장소를 넘어 지역사회 중심 공간이자 커뮤니티센터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구석진 폐교 건물 대신 전철역과 상가가 있는 신도시 중심부 중앙공원을 도서관 터로 정했다. 45억 엔(약 413억 원)을 들여 지하 2층, 지상 2층 도서관 건물을 지었다. 공원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층수는 낮게 하면서 옆으로 길게 지어 어디서든 공원 잔디밭과 호수를 볼 수 있게 했다. 1층 정문은 상가 쪽, 2층 출입구는 공원 쪽으로 냈다. 장을 보다가, 공원을 산책하다가 가볍게 들를 수 있는 구조다. 도서관 터를 조성하기 위해 베어 낸 나무들로 열람실 책상과 의자를 제작해 주민들의 친밀도를 더욱 높였다.
무엇보다 적당한 수다를 허용하면서 도서관 문턱이 확 낮아졌다. 책을 눈으로 읽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접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지식 교류의 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다마 시립 중앙도서관 같은 ‘떠드는 도서관’ 실험은 최근 개관하는 일본 각지 도서관으로 조금씩 퍼지고 있다. 150억 엔(약 1380억 원)을 들여 지난해 문을 연 이시카와현 현립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1층부터 4층까지 뻥 뚫린 로마시대 원형극장 형태 대형 홀에 책 30만 권을 채운 이 도서관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국에서 인파가 몰리고 있다. 반드시 조용히 있어야 하는 ‘사일런트 룸’이 아니면 관내에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고 휴대전화도 받을 수 있다. 사거나 들고 온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어도 된다. 이시카와현 도서관 정책 담당자가 직접 북유럽 국가를 둘러보고 도서관에 게임기, 커피기계를 두는 파격적인 현지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일본 남서부 사가현 인구 4만6000명 소도시 다케오시(市)는 2013년 시립 도서관 운영을 대형 서점업체 ‘쓰타야’를 운영하는 컬쳐컨비니언스클럽(CCC)에 위탁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했다. CCC는 낡은 시골 도서관을 도쿄 도심에나 있을 법한 세련된 고급 서점처럼 단장했다. 입소문을 타고 도서관 방문객은 3배 이상으로 늘고 지역 숙박시설 가동률은 2배로 증가하는 등 지역 경제 살리기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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