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 보면 머리 지끈거리는데도 굳이 회계사를 주인공 삼은 건('넘버스')
[엔터미디어=정덕현] MBC 금토드라마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은 사실 제목부터 진입장벽이 느껴진다. 숫자들이다. 회계법인이 드라마의 주공간이고 회계사들이 주인공이자 빌런이다. 회계니 청산이니 회생이니 하는 경제용어들만 떠올려도 어딘가 머리가 아픈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넘버스>도 이 소재가 갖는 진입장벽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들을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목숨이고 삶 자체일 수 있다고 말하며.
진입장벽을 넘게 해주는 장치로 <넘버스>는 복수극을 가져왔다. 버려져 공사장 한편에 앉아 있던 장호우(김명수)를 친자식처럼 키워준 은인 해빛건설 장인호(남명렬) 사장을 끝내 자살하게 만든 태일회계법인에 대한 복수다. 장인호 사장을 그렇게 만든 건 해빛건설 채권단을 대리하는 태일회계법인이 쓴 종이 한 장, '청산결정서' 때문이다.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 숫자들은 순식간에 멀쩡한 해빛건설은 물론이고 납품업체들까지 줄도산 위기로 내몬다. 결국 죄책감에 장인호 사장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장호우는 분노하며 숫자를 앞세워 철거해 들어오는 용역업체들과 싸우지만 태일회계법인의 한승조(최진혁)은 그에게 현실을 알려준다. "이따위 싸구려 저열한 힘으론 아무 것도 못 지켜. 네 그 분노? 아무 힘도 없다고." 힘이 있는 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청산결정서고 거기 적혀 있는 숫자들이다. 이 장면은 <넘버스>가 보여주려는 세계를 분명히 말해준다. 흔히 복수극에서 주먹이 법보다 앞서는 것으로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그것보다 회계 같은 '숫자'가 더 힘을 발휘한다는 것. 그래서 복수도 바로 그 숫자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넘버스>는 장호우가 각성하고 회계사가 되어 끝내 태일회계법인에 들어가 해빛건설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찾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회계 보고서를 찾아 읽어내고 멀쩡했던 기업을 무너뜨린 보고서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를 찾아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회계나 청산, 회생 같은 경제 관련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풀려 나온다.
물론 이 세계가 낯선 시청자들을 위해 회계법인이 하는 일을 거위에 비유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회계법인은 채권자 입장에서 돈을 빌려준 기업을 계속 살려둘지 아니면 회사 문을 닫을지 결정한다. 쉽게 말해 거위를 살려두고 거위가 낳는 알을 계속 얻는 게 이득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 거위를 잡아 거위의 털과 고기를 내다 파는 게 이득인지 그 둘을 비교하는 것. 편의상 거위를 계속 살려두고 거위 알을 얻는 전자를 '계속기업가치', 거위를 죽이고 털과 고기를 내다 파는 후자를 '청산가치'라 부른다. 그 둘을 비교해 청산가치가 더 크면 거위는 죽고 기업은 문을 닫는다. 반대로 계속기업가치가 더 크면 거위는 살고 기업도 산다. 한마디로 회계법인의 손에 기업의 생사가 달려 있다는 것."
<넘버스>는 회계 같은 낯선 숫자의 세계 속으로 인도한다. 그것을 보다 쉽고 재밌게 풀어내기 위해 장호우의 복수극은 물론이고, 그가 이 회계법인에 들어와 조금씩 성장해가는 오피스 성장드라마 그리고 진연아(연우) 같은 선배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멜로드라마 등을 엮어 놓았다. 물론 원수인 줄 알았던 한승조 역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호우가 그와 만들어가는 브로맨스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숫자를 갖고 장난질을 하는 태일회계법인 같은 이들이 생겨나는 건 거기에 막연한 진입장벽을 느끼며 무관심했던 우리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지 않을까. 그걸 보다 쉬운 접근방식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넘버스>는 적어도 그 진정성이 느껴진다. 숫자로 굴러가는 세상이지만 어째서 그 숫자만 나오면 머리 아파하며 외면하려 했을까. 그 숫자 뒤에 우리네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넘버스>를 보면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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