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헬스장 먹튀' 26만원…"소송·재판 다 소용 없더라" 울분
서울 암사동에 거주하는 홍모 씨(30)는 대학생이던 2015년 7월 아파트 근처의 A 헬스클럽에 53만원을 내고 6개월 치 회원권을 끊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만인 8월, 홍 씨는 헬스클럽 대표 조모 씨(46)로부터 황당한 안내를 받았다. “이곳 헬스장이 문을 닫을 예정이니 길 건너에 있는 B 헬스클럽으로 옮겨달라”는 것이다. B 헬스클럽은 조 씨가 관리하던 또 다른 영업장이었다.
홍 씨를 비롯한 회원 수백명은 “B 헬스클럽은 시설이 나쁘고 위치가 불편하다”며 환불을 요구했지만 조 씨는 핑계를 대며 시간만 끌었다. 홍 씨에겐 “고객님 앞에 대기자가 110명가량 있으니 기다리라”며 시간을 끌었다. 홍 씨가 크게 항의하자 조 씨는 결국 11월 말이 돼서야 등록비의 절반인 27만원만 송금하고선 연락을 끊었다.
사기를 직감한 홍 씨는 이듬해 1월 한국소비자원에 피해구제를 신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고 했다. 소비자원은 “조 씨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조정이 어렵다고 통보했다. 소비자원은 분쟁 조정기관일 뿐 수사기관은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 간 연락이 닿지 않으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홍 씨는 법률구조공단의 조언에 따라 서울동부지법에 조 씨를 상대로 “나머지 26만원을 돌려달라”는 취지의 소액재판 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소장을 제출한 시점은 2016년 3월. 이때부터 홍 씨의 지난한 소송 과정이 시작됐다.
송달부터 '삐걱'... 26만원 돌려받는데 재판만 2년 넘어
홍 씨는 “소송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고 했다. 홍 씨는 통신사 조회를 통해 확인한 조 씨의 주소로 소장을 보냈지만, 수취인 불명이라는 이유로 여러 번 거절당했다. 법원으로부터 ‘주소보정명령’을 받아 초본을 발급받아 조 씨의 최신 주소를 알아내고 재차 송달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송달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이 공시송달을 결정하면서 뒤늦게 재판이 시작됐다. 2017년 1월 나온 재판 결과는 홍 씨의 승소. 그러나 이는 소송 과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소송비용을 확정하는 절차도 별도로 필요해서다.
홍 씨는 소송비용까지 돌려받기 위해 '소송비용액확정 결정 신청'이라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홍 씨는 같은 해 5월 소송비용(4만5020원)을 법원서 확정받았다.
홍 씨는 “이때만 하더라도 돈을 금세 돌려받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민사소송에서 승소했음은 물론 소송비용까지 확정받아서다. 그러나 홍 씨가 승소한 판결문은 ‘돈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를 인정해주는 역할만 한다. 조 씨가 ‘돈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비로소 압류나 추심을 거쳐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결국 홍 씨는 2017년 6월 조 씨에 대한 '재산 명시 소송'을 시작했다. 조 씨에게 재판에 출석해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재판이다. 조 씨가 관련 자료를 허위로 제출하면 처벌 대상이 되는 데다 잇따라 재판에 불출석하면 감치까지 당할 수 있는데, 그간 한 번도 재판장에 나오지 않았던 조 씨는 2차기일이 돼서야 출석했다. 그는 재판장서 “재산이 한 푼도 없다”고 답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홍 씨는 같은 해 11월 재산조회 소송까지 진행했다. 홍 씨는 은행당 5000원을 부담하며 주요 은행 약 10곳에 조 씨의 이름으로 잡힌 돈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각 은행으로부터 “확인된 재산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조 씨의 주소로 돼 있는 집의 전세금을 압류하는 방법이 있지만, 홍 씨는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설령 압류하더라도 방법이 없을 수 있다”고 했다. 조 씨의 집이 전세인지, 월세인지는 물론 보증금이 있는지부터 불확실해 압류 신청 절차가 까다로워서다. 홍 씨는 “동산 압류는 심리적 압박 수단일 뿐 실질적인 효과는 약하다고 들었다”고 했다.
결국 홍 씨는 최후의 수단으로 2017년 12월 ‘채무불이행자 명부 등재’ 재판을 진행했다. 조 씨가 돈을 갚지 않는 한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정상적인 금융 생활을 못하게 막겠다는 것이다. 조 씨는 2018년 3월 채무불이행자명부에 등재됐다.
"소액사기 구제는 사법시스템 구멍" 지적
문제는 홍 씨가 이처럼 갖은 수를 동원했더라도 돌려받은 돈은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약 3년에 걸쳐 홍 씨의 시간과 돈만 더 들어갔을 뿐이다. 현재 조 씨는 동거인 명의로 금융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은 조 씨의 편이다. 민법상 채권소멸시효가 10년이기 때문이다. 조 씨는 2027년 초까지만 버티면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 시효를 연장시키리면 홍 씨는 다시 재판을 거쳐야 한다. 홍 씨는 "조 씨가 지금 어디에 살고 직업은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저 휴지 조각이 된 판결문 하나만 남았다"며 한탄했다.
법조계에선 3년 가까이 여러 번 재판까지 거치고도 ‘먹튀’를 구제받을 수 없는 현실이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홍 씨 입장에선 사기죄로 형사소송을 진행할 경우 떼인 돈보다 변호사 선임 비용이 더 많이 들어 소송 포기하게 된다. 홍 씨처럼 나홀로소송으로 가능한 법적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대다수 피해자는 돌려받을 수 있는 돈보다 소송 과정에 들어가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크기 때문에 지레 포기한다.
‘돈이 없다’는 조 씨가 버젓이 B 헬스클럽을 운영하고 있어도 돈을 되찾기 어렵다. 조 씨가 만일 다른 법인을 세워서 B 헬스클럽을 운영했다면 강제집행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법인재산과 개인재산은 분리되는 것이 원칙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소송이 들어올 것을 염두에 두고 재산을 미리 빼돌렸으면 ‘사해행위 취소소송’을 시도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돌려받을 돈이 거액일 때나 고려할 뿐 소액사건은 대체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강민주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단체소송으로 진행하면 청구 금액이 커져서 증액 재판부나 합의부 재판을 받을 수 있고, 변호사 선임에 있어서도 비용을 참여자들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를 모집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조 씨 입장에선 홍 씨 같은 고객 500명만 있어도 1억 원 넘는 돈을 챙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형식적인 변제 의무마저 사라진다. 조 씨는 변제의사를 묻는 말에 “2015년 일을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답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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