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이종찬의 ‘원년 1919년’ vs 김영호의 ‘건국은 혁명’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절친 이철우 연세대 로스쿨 교수의 부친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가 5월 말 당선된 직후 윤 대통령이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국가의 정체성만 바로 서면 나라가 정상화된다”는 구절을 공개하며 이종찬은 국가정체성 회복을 광복회 비전으로 들고 나왔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이고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의 종손자다. 1919년 세운 임정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로단체’를 자임한 광복회의 회장이 국가정체성의 원천으로 ‘대한민국 원년 1919년’을 드는 식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우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생각나서다.
● 이인호 명예교수 “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
역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나섰다. ‘이종찬 광복회장에게…“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는 6월 30일자 공개 서한을 통해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출범이 우리 대한민국 수립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라고 쓴 것이다.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표현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현행 헌법 전문이나 마찬가지로 독립의지와 민주공화국의 이념적 기조가 그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해석되는 한에서는 무난할 수 있다”고 전제하긴 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정식국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1919년 건국설은 문재인 같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맹목적 통일지상주의자들 일부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내놓은 주장임을 모르십니까?”
● 통일장관 후보자 김영호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
통일부 장관 후보자인 김영호도 비슷한 역사인식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한국사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의 큰 혁명”이라고 했다. 혁명은 기존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화가 따를 때, 혁명이다(전임 정권이 주장했던 ‘촛불혁명’이란 말은 자칭 ‘촛불정부’가 체제를 뒤바꿀 의도가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소리다). 과거 왕조체제를 복원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근대국민국가를 새롭게 세웠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자 지령문을 통해 북한지역에 소련 우호적인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소련과 북한 공산세력과의 타협을 통한 새로운 국가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꿰뚫어본 정치인이었다. 남한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세워야 한다는 1946년 3월의 정읍 발언을 김영호는 ‘이승만 독트린’으로 규정했다.
1919년 수립된 임정은 안타깝지만 영토와 주민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지도 못했다(근대국제정치체제의 출발점이 된 베스트팔렌체제에 따르면 승인은 국가 존재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미국은 유럽의 망명정부들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가 확인될 때까진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정은 국민투표를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말 그대로 ‘임시정부’였다고 김영호는 2015년 저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에 썼다.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국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다.
● 소모적 역사전쟁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이인호 역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선포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혁명에 필적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했다. 외세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됐다는 점에서 미국의 독립혁명 같은 혁명이라고 본다.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기본인권을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했다는 점에선 두 혁명과 비견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보는 역사관을 ‘뉴라이트’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강만길 류의 ‘분단사관’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을 폄훼했던 좌파가 그랬다. 빨치산 투쟁을 했던 김일성의 북한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국사 교과서를 왜곡했고, ‘주류세력 교체’를 주장하며 반일에 죽창 들고 나서자던 세력은 ‘나라가 반토막나는 것보다 전체가 공산화된 것이 낫다’고 믿을지 모른다(그리고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벼르고 있을 수도…).
소모적 ‘역사전쟁’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1919년 건국설’이 반(反)대한민국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고 이인호는 지적했을 터다. “이종찬 회장께서 결코 반대한민국 종북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예의바르게 썼음에도…이종찬은 완강한 반응을 보였다. 3일 광복회 홈페이지에 올린 공개 회신에서 “나는 ‘대한민국 원년은1919년’이라고 했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쓴 거다.
● “원년은 1919년” 부정하면 반민족?
이종찬은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으로 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라며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라고써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당연하다. 그들은 조선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취지에서 이인호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지난달 제74주기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에서 “대한민국의 원년이 1919년임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극좌파 친북이적집단 아니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세력”이라고 못박은 데 이어 ‘회신’에선 “좌나 우나 할 것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극좌 아니면 극우, 심지어 반민족이라는 발상은 그가 1980년대 활약했던 전두환 파쇼정권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잠시 반성했다. 극단적 용어는 쓰지 말아야겠구나(몹시 찔리는 게 사실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함부로 단죄하지 말아야겠구나, 공인은 공선사후(公先私後)하지 못하다고 보이면 안 되겠구나…하고.
● 북에서 정통성 찾는 세력, 제발 북조선으로
우리나라가 세워진 기점(起點)을 언제부터 기산해야 할지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와 학설이 있어 왔다. 크게 보면 백범을 중시하는 1919년설과 이승만을 중시하는 1948년설로 나눠지는데 “문헌연구를 통해 볼 때 대립하는 두 학설을 비롯한 다양한 주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분석이다(2009년 논문 ‘건국 기점 논쟁’).
“1919년 대한민국임정 수립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가져왔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에서는 합법성-정당성(legality)을 가져왔다고 하면 양자간의 갈등관계도 화해되면서 임정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의 합법성으로 계승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은 안정감을 준다. 다양한 논쟁도 다원사회의 장점을 표출했다고 보면 의미있는 일이다.
이젠 우리끼리(북에서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 아님) 소모적 역사전쟁은 접을 때가 됐다. 북한 김여정이 무슨 속셈인지 돌연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칭하고 나섰으니, 우리도 그쪽을 ‘북조선’이라고 불러줘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북조선에 우리나라의 정통성-정당성이 있다고 믿는 세력은 제발 북조선으로 가줬으면 좋겠다(너무 극단적인가요…).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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