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최욱경·니키 드 생팔의 뱀’ 보석명가 불가리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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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품은 채 똬리를 틀고 쉴 새 없이 혀를 날름거리는 뱀은 누구나 기겁하는 동물이다.
누릿한 몸 허물을 벗고 검푸른 새 몸으로 삐져나오는 뱀 네마리의 혈기방장한 모습이 청량감을 일으키는 천경자의 1969년작 <사군도> 가 내걸려있는 들머리의 풍경부터 예사롭지 않다. 사군도>
천경자 작품 못지않게 조형의식과 만듦새가 눈길을 끄는 출품작이 케이 2전시장에 나온 최욱경의 설치 조형물 <뱀이 된 나무> 다. 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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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품은 채 똬리를 틀고 쉴 새 없이 혀를 날름거리는 뱀은 누구나 기겁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시각예술가들은 거꾸로 뱀을 가까이하면서 작업 소재로 즐겨 쓴 이들이 적지 않다. 평생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으며 수시로 허물을 벗어 새롭게 정결하게 재생하는 생태적 특징은 강렬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곤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채색화가이자 <미인도> 위작논란으로 세간에 알려진 천경자 화백(1924~2015)이 바로 이런 뱀그림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의 출세작은 바로 한 화폭에서 뱀 서른다섯마리가 뒤엉켜 꿈틀거리는 <생태>라는 그림이었다. 1952년 피난수도 부산의 전시장에서 선보인 이 강렬한 뱀 그림은 부친과 동생의 잇따른 죽음과 전쟁으로 비롯된 불안과 공포, 허탈감을 뱀탕집의 뱀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 직관적으로 교감한 결실이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뱀의 화가’ ‘생명과 생태의 화가’란 인식을 화단에 심게 된다.
국내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화랑인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천경자의 또 다른 뱀 그림을 필두로 뱀과 여성미술가들의 관계를 살펴보는 독특한 전시마당이 요사이 차려졌다. 누릿한 몸 허물을 벗고 검푸른 새 몸으로 삐져나오는 뱀 네마리의 혈기방장한 모습이 청량감을 일으키는 천경자의 1969년작 <사군도>가 내걸려있는 들머리의 풍경부터 예사롭지 않다. 뜻밖에도 전시를 주최한 곳은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둔 세계 굴지의 다국적 보석회사인 불가리다.
이 브랜드가 이 화랑과 손잡고 지난달부터 케이 1, 2, 3 세 전시장 전관을 빌려 마련한 기획전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그 끝없는 이야기’란 제목의 전시회다. 세르펜티는 1948년 이 명품회사가 뱀의 머리와 몸 형상을 모티브로 내놓은 팔찌, 시계, 목걸이 등의 디자인 명품이다. 그 출시 75돌을 기념하는 전시에 한국 근현대미술판을 수놓은 주요 여성작가인 천경자와 최욱경(1940~1985), 홍승혜(64), 최재은(70), 함경아(57)씨와 프랑스의 여성주의 미술거장 니키드 상팔(1930~2002)의 작품들을 세르펜티 명품들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빤한 보석 명품 홍보전 차원을 넘어 뱀에 몰입한 여성미술 대가들의 낯선 작품들을 쾌적하고 넓은 전시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천경자 작품 못지않게 조형의식과 만듦새가 눈길을 끄는 출품작이 케이 2전시장에 나온 최욱경의 설치 조형물 <뱀이 된 나무>다. 요절한 1985년 만든 이 작품은 길거리에서 주운 길쭉한 나뭇조각에 뱀 형상의 상상력을 부여하면서 가지마다 색실을 감고 조였다.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의식과 여성성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이런 의식을 옥죄는 현실의 벽까지도 연상할 수 있게 한 작품인데 가지 옆에 동그랗게 색실 더미를 놓은 구도가 당시 작가의 울적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감흥을 낳는다.
최재은의 설치 작품은 아침 녘 황금뱀들이 이슬을 맛보기 위해 모여드는 상상의 풍경을 황금뱀을 그린 종이삿갓등과 그 아래 ‘Dew’(이슬)라고 쓰인 종이덩어리가 놓인 풍경으로 재치있게 형상화했다. 컴퓨터 픽셀 모형 덩어리로 뱀 관절의 분절된 형상들을 집적시켜 펼쳐놓은 홍승혜 작가의 설치작품과 평면 작업들도 뱀에 얽힌 여성작가들의 다기한 해석 방식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불가리 브랜드가 미국 니키드 생팔 재단에서 대여해온 생팔의 뱀조형물과 드로잉들은 1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전시의 알짬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상식적 이미지와 다른 생의 율동과 에너지를 담뿍 머금은 뱀들의 밝고 약동하는 모습들을 형상화했다는 점이 새롭다. 사전 예약하지만, 그냥 가서 기다려도 전시를 볼 수 있다. 7월3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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