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감각[오늘을 생각한다]

2023. 7. 1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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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이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따금 끊기고 선명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네? 무슨 논개라고요? 논개가 이주를 한다고요?”

동문서답하는 내 물음에 전북지역 한 환경단체의 선생님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강조했다. “아니요. 논개가 아니라 흰.발.농.게. 흰발농게를 이주시키려 한다고요!”

검색해보니 한쪽 발이 유난히 큰 하얀 ‘게’ 사진이 여러 장 나왔다. 군산시가 멸종위기 2급인 이 녀석에 대한 이주사업을 진행하고 있구나. 몇 주 뒤, 간단한 자문의견서를 보냈다. “원고적격 충족 어려움, 절차 위반 경미, 실체 위반은 이익 형량 사안인데, 쉽지 않아 보임.” 그렇게 흰발농게에 대한 기억은 잊혀갔다. 그러다 며칠 전 극장 스크린에서 이 녀석이 흙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최근 관객의 힘으로 극장가에 걸려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수라>라는 다큐의 시사회였다. <수라>는 새만금 지역에 ‘다행히’ 남아 있는 갯벌과 그곳 무수한 생태계의 아름다움을 직관하게 해준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또 슬퍼 거의 첫 장면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흰발농게를 목도했을 때, 불현듯 2020년 더운 여름날 나눈 한 통의 전화가 떠올랐다. 그 당시 고민해보다 별다른 방도가 없겠다 하고 포기한 일도.

다큐는 2005년 새만금 소송 최종 판결 시 법대 위에 앉아 있는 대법관 13명의 근엄한 표정을 비춘다. 판결문이 낭독되자, 누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친다. “역사가 당신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한 시민단체는 그날의 선고를 ‘생명에 대한 대법원의 사형선고’라고 평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다큐 <수라>를 보니, 그 평가는 일부 옳고, 일부 틀렸다. 생명은 터전을 잃었지만, 남은 한 줌의 공간을 알뜰히 활용해 견디고 움튼다. 갯벌에 한 번 와보지도 않은 사람들은 갯벌이 죽었다고 단언하지만, 그곳을 지켜본 이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오류투성이 환경영향평가를 반증하기 위해 긴 세월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한다. 앎은 지식 이전에 경험의 영역이기도 한데, 경험으로 아는 영역은 종종 경시되는 것 같다. 나는 갯벌에 가보지도, 흰발농게를 만나보지도 못했으면서 사진 몇 장과 법률지식만으로 사안을 안다고 생각하고 답을 내렸다. 내가 활동가들만큼 갯벌과 흰발농게를 경험했다면, 더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 같다. 이제 보니 그땐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최선은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별수없네’ 하며 마음으로 먼저 졌고, 어쩔 수 없다며 쉽게 잊었다.

다큐 <수라>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알아버린 죄인’이 됐다. 그럼에도 한 번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끈질긴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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