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한 일, 이 호수는 다 안다…23m 수심 ‘블랙박스’
인류세 대표 지층…역사적 지문 매년 퇴적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중 하나인 이로쿼이족은 크로퍼드 호수의 심연이 끝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수 옆에서 옥수수밭을 일구며 목조주택에서 함께 잤던 그들은 13세기와 15세기 두 차례 이곳을 머물다가 사라졌다. 호수 속 괴물이 가로채 데려가기라도 한 건가?
크로퍼드 호수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최대 도시 토론토에서 30분이면 갈 만큼 가깝다. 운동장 두어 개 크기(2.4㏊)로 작지만, 수심이 23m에 이를 정도로 깊다.
이 호수가 유명해진 건 이런 예외적인 지형 특성 때문이었다. 면적이 작고, 수심이 깊은 이 호수는 윗물과 아랫물이 섞이지 않는다. 호수 밑바닥에는 산소가 거의 없어서 물고기, 곤충, 유기물질이 내려가지 못한다. 그저 무기물질이 아주 천천히 낙하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1년에 한층씩 짓는 아파트처럼, 크로퍼드 호수의 밑바닥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역사를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다. 호수에 생기는 나이테처럼 말이다.
이로쿼이족이 살면서 농사를 지은 것도 과학자들이 1970년대 이 퇴적층에서 발견한 꽃가루를 통해 알아냈다. 이를 실마리 삼아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벌였고, 공동주택 등 수백년 전의 원주민 유물을 발견했다.
“우리는 홀로세를 벗어났다”
인류세실무그룹(AWG)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는 11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하르나크 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인류세의 시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두 단체는 “인간이 지구 기후와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됐음을 이 호수의 퇴적층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류세’(Anthropocene)는 200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처음 제안했다.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등 인간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홀로세의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지구가 새로운 지질시대(인류세)에 들어섰다는 주장이다. 곧장 지질학계는 물론 자연과학과 역사와 철학, 사회과학자의 토론 대상에 올랐고, 기후변화정부간패널(IPCC) 보고서에 등재될 만큼 보편적인 개념이 됐다.
지층의 형태∙배열∙시대를 연구하는 층서학자들도 국제표준층서구역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제표준층서구역은 지구적 변화를 선명히 보여주는 일종의 대표 지층인데,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하는 지점에 박는 동판의 모양 때문에 ‘황금 못’(골든 스파이크)이라고도 불린다.
지질학계는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식 인정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연구단을 만들었다. 국제층서위원회(ICS) 산하에 인류세실무그룹을 꾸려 지난해부터 후보지 12곳을 조사해왔다. 일본 벳푸만의 해저 퇴적층과 오스트레일리아 플린더스 산호초, 남극반도의 빙하코어 등이 후보지에 이름을 올렸다. 과거엔 삼엽충 화석 같은 것이 들어있는 암석이나 물리적 지층이 지정됐다면, 최근 들어선 다양한 물리화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곳도 국제표준층서구역으로 지정될 수 있다.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는 인류의 거울
크로퍼드 호수는 환경 변화와 인류 활동을 가장 깔끔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호수를 연구한 논문과 인류세실무그룹의 자료를 보면, 호수 밑바닥에는 인간 활동이 남긴 역사적 지문이 매년 새겨져 있었다. 원주민의 농업 활동으로 호숫물에 부영양화가 발생했다는 사실, 유럽인들이 들어와 대규모로 벌목하고 제재소를 운영한 사실, 1930년대 북미대륙 중부에서 몰아쳤던 모래폭풍(더스트 볼)까지 호수 속 퇴적층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인류가 가장 예리하게 지문을 찍은 건 1950년대였다.
캐나다 브록대의 프랜신 매카시 교수 등 12명의 과학자들은 지난 2월 학술지 <인류세 리뷰>에서 “이 호수를 통해 1950년을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간 자연에 없던 인공 물질들이 1950년대를 기점으로 급상승한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핵실험과 원전에서 발생하는 ‘플루토늄’은 1950년대에 예리하게 지문을 남겼다.
영국 사우스햄프턴대의 앤드류 쿤디 교수(환경방사선학)는 이날 이 대학이 낸 보도자료에서 “자연에서 플루토늄은 미량으로만 존재하지만, 수소폭탄 실험이 이뤄진 1950년대 초 전 세계 샘플에서 플루토늄 수치가 전례 없이 급등한다”며 “플루토늄의 존재는 인류가 지구에 독특한 지문을 남길 정도로 지배적인 세력이 된 시기를 보여주는 뚜렷한 지표”라고 밝혔다. 인류세실무그룹은 플루토늄을 인류세를 대표하는 주요 마커(표식)로 선정했다.
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발전소에서 고온에서 태울 때 배출되는 ‘구형탄소입자’(SCP)는 남극과 북극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검출되는데, 크로퍼드 호수에서도 1950년대 들어 급증했다. 이 밖에 오대호 지역의 공장과 산업시설로 인한 ‘산성비’도 퇴적층에 세밀하게 새겨졌다.
1950년대는 인류 활동이 폭발한 ‘대가속기’(The Great Acceleration)가 시작된 시기다. 인류세 논의 초기에는 산업혁명이 그 시작점으로 여겨졌지만, 지구시스템 과학자 윌 스테픈의 제안에 따라 인류세실무그룹은 대가속기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결정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엔진이 된 소비자본주의 그리고 공장식 축산과 일상을 점령한 플라스틱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온실가스와 해양 산성화, 토지 개간 등 지구시스템 지표를 비롯해 인구와 대형댐, 에너지 사용량 등 사회경제 지표가 1950년대를 통과하며 급증한다.
부산에서 새 지질시대 개막될 가능성 커
이번에 인류세실무그룹이 발표한 인류세 지질시대 안은 제4기층서위원회(SQS)와 내년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차례로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두 기구에서 60% 이상 찬성으로 이 안이 통과된 뒤, 내년 8월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지질학총회(IGS)에서 최종적으로 비준을 받게 된다.
비준이 완료되면, 인류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1만1700년 동안 이어져온 ‘홀로세’(Holocene)를 끝내고 인류세에 살게 된다. 인류세 첫 ‘절’의 이름을 국제표준층서구역에서 따오는 만큼, 내년부터 인류는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퍼드절’에 살게 되는 것이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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