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는 왜 자신을 사찰한 ‘사직동팀’을 그냥 뒀을까

박찬수 2023. 7. 1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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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3
사직동팀의 주요 업무는 고위공직자 감찰과 대통령 친인척 및 특수관계인 관리였다. 전직 경찰 간부는 “사직동팀은 대통령을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권력 남용이나 비리를 견제하라고 만들어졌다. 그런데 조사 대상에 야당 정치인과 사회 유력인사들이 포함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사직동팀은 23년 전인 2000년 10월 김대중 정부 시절에 해체했다. 사직동팀 해체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형 비리’는 누군가 감시해야 한다. 지금 대통령 친인척 관리는 누가 하고 있는 것일까.
한나라당의 ‘디제이(DJ) 비자금 의혹 폭로’가 나온 직후인 1997년 10월9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이종찬 부총재로부터 대책을 보고받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직동팀이 야당 정치인을 불법 사찰해왔음이 드러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직동팀과 민정수석실 ①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던 2022년 3월14일 ‘대통령 비서실에서 민정수석실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세평 검증을 위장해 정적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며 “일명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은혜 당시 인수위 대변인은 이를 두고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당선인 구상을 피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민정수석실 폐지를 밝히면서 ‘앞으로 사직동팀은 없다’고 굳이 강조한 이유는 뭘까. 사직동팀이 해체된 건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여기엔 민정수석실과 사직동팀을 동일시하는 윤 대통령의 기본 인식이 배어 있다. 민정수석실 기능을 너무 좁게 인식한 것이다.

사직동팀은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2000년 10월 김대중 정부 시절에 해체됐다. 사직동팀 해체는 청와대 비서실의 핵심인 민정수석실 역할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5공 전두환 대통령 때는 청와대 비서실에 민정수석과 사정수석, 법무수석 등 3명의 수석비서관을 둘 정도로 민정 기능이 막강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듣던 시절이다. 그 핵심이 청와대 하명사건을 조사하는 사직동팀이었다.

사직동팀의 정식 명칭은 경찰청 조사과다. 경찰청 형사국 소속이지만, 형사국 회의에 참석하지도 보고하지도 않는다. 오직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휘를 받는다. 사직동팀 보고서는 민정수석을 거쳐 대통령 책상에까지 올라갔다. 대통령 결재가 떨어진 사안은 검찰 또는 경찰로 전해져 정식 수사에 들어가곤 했다.

사직동팀은 30명 안팎의 경찰 에이스들로 구성됐다. 사직동팀에 근무했던 전직 경찰 고위간부의 얘기다. “팀원을 뽑는 데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40대 이상, 4년제 대학졸업 이상(1980~90년대만 해도 격렬한 시위 진압과 여러 오명(汚名) 사건들로 인해 경찰관에 지원하는 4년제 대학졸업생들이 많지 않았다), 정보·수사·보안(대공) 분야의 10년 이상 베테랑들을 뽑았다. 군사정부 시절엔 정권이 바뀐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오직 대통령만 바라보면 됐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때부터 조금씩 선발 기준이 달라졌다. 물론 능력을 보지만, 우리 사람이냐 믿을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경찰관 누구든 정권 실세의 지원이 없으면 사직동팀에 들어오기 힘들어졌다.”

원래 사직동팀의 주요 업무는 고위공직자 감찰과 대통령 친인척 및 특수관계인 관리였다. 전직 경찰 간부는 “사직동팀은 대통령을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권력 남용이나 비리를 견제하라고 만들어졌다. 고위공직자, 대통령 친인척, 대통령과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범주다. 특수관계인이란 대통령의 오래된 고향 친구나 정치적 후원자, 학교 동창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애초 목적은 좋았던 셈이다. 그런데 조사 범주에 야당 정치인과 사회 유력인사들이 포함되니까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정보수집 방식도 불법적이었다. 말이 ‘내사’지 사실상 정부기관을 총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전직 경찰 간부는 “사직동팀이 무서운 게, 전국 경찰조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대통령 직속이다 보니까 다른 정부기관 협조를 언제든 요청할 수 있었다. 내사(內査)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소환 조사를 하지 않을 뿐, 재산 상황과 금융거래 내역 등을 국세청이나 금융기관 협조를 받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김영삼 정부 때 이뤄진 사직동팀의 ‘김대중(DJ) 비자금 의혹 내사’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사직동팀 폐지 방침을 발표한 2000년 10월16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사직동팀 건물 정문이 굳게 닫힌채 적막에 쌓여 있다. 사직동팀은 경찰 소속이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휘를 받았다.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1995년 디제이가 정계에 복귀한 뒤 사직동팀은 배재욱 청와대 사정비서관 지시로 디제이 친인척의 은행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사직동팀은 은행감독원과 증권감독원(두 기관은 1999년 금융감독원으로 통합된다)에 ‘협조’를 요청했다. 두 기관의 직원 20여명이 계좌추적에 동원됐다. 청와대 직할인 사직동팀의 위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2년간 사직동팀이 뒤진 디제이 관련 계좌는 모두 704개에 달했다. 그 무렵 사직동팀 팀장(총경)을 지낸 박아무개씨는 “업무 인수인계를 받을 때 이런 일(디제이 비자금 추적)을 한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이래도 되냐’고 하니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더라”라고 훗날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렇게 모은 자료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형근 국회의원을 통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건네졌고, 강삼재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폭로 기자회견으로 이어졌다. 사직동팀의 불법 수집자료가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공작에 활용된 것이다. 하지만 이 폭로는 검찰의 수사 유보로 유야무야된 채 그해 12월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디제이는 수년간 자신의 뒷조사를 했던 사직동팀을 ‘정치사찰의 핵심’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고위공직자와 유력 인사들을 불법 사찰하고 때론 고문 수사한 전력이 있는 사직동팀을 폐지하라는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디제이는 집권한 뒤 뜻밖에도 사직동팀을 그대로 뒀다. 청와대 민정수석 직위(차관급)를 없애고 민정비서관(민정·민원 담당)과 법무비서관(사정·공직기강·법률 담당)으로 급을 낮췄을 뿐이다. 그나마 민정수석 직위도 1999년 5월 옷 로비 의혹 사건 이후에 부활했다. 디제이는 왜 자신을 사찰한 기관을 그냥 뒀을까.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박선숙씨는 “디제이는 사직동팀의 문제가 크지만,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공직자 비리를 감시하는 나름의 순기능은 있다고 봤다. 대통령이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조직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유지하면서 폐지 여부를 천천히 검토하기로 했다. 디제이는 청와대 조직과 사람을 바꾸는 데 매우 신중했다. 심지어 정권교체를 했음에도 연설비서관을 비롯해 비서관 여럿은 김영삼 청와대 사람을 그대로 썼다”고 말했다.

사직동팀은 김대중 정부 3년차인 2000년 10월 끝내 해체된다. 1999년 5월 재벌 회장 부인과 검찰총장 부인 등이 관련된 이른바 ‘옷 로비 의혹 사건’이 터지기 전, 사직동팀이 이를 내사해서 보고서를 올렸다. ‘검찰총장 부인이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다는 소문을 내사했으나 사실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옷 로비 의혹 사건이 터지자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이 보고서를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건넸다. 보고서는 언론에 유출돼 큰 논란을 빚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정비서관실을 민정수석실로 확대 개편했다. 부활한 민정수석엔 김성재 한신대 교수가 임명됐다가 2000년 1월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신광옥씨로 바뀌었다.

사직동팀은 이번에도 간신히 조직을 유지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팀원들의 비리가 잇따랐다. 고위공직자나 재벌 회장, 사회 유력인사들의 소문에 관해 대통령에까지 올라가는 보고서를 쓸 수 있다는 건 막강한 ‘권력’이었다. 기업 대관팀에선 사직동팀 경찰관들을 접촉하고 때론 접대하며 자기 회사나 오너에 관한 첩보가 없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1999년 10월 사직동팀 경정 한명이 신용보증기금 대출보증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 직후 김대중 정부는 사직동팀 해체와 팀원 전원의 경찰 복귀를 발표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신광옥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 들어가서 보니까 사직동팀은 이미 통제권을 벗어나 있었다. 민정수석인 나도 그 팀에서 보고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김 대통령에게 이 팀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자세히 듣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사직동팀 전원을 경찰로 되돌려 보냈다. 사직동팀에서 했던 일, 곧 대통령 친인척 관리와 고위공직자 비리 내사 등은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서 각 기관의 국장급을 파견받아서 하도록 했다.”

사직동팀 해체 건의는 민정수석실뿐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라갔다. 박선숙 전 공보수석은 “1999년 옷 로비 의혹 사건이 일어난 뒤 김 대통령에게 사직동팀을 해체하자는 건의를 했다. 김 대통령은 ‘나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다만 사직동팀 내사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된 게 문제지, 내용이나 작성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게 대통령 생각이었다. 시민사회 단체에서도 해체 의견을 대통령에게 많이 전달했다. 그러다가 비리 사건까지 터지자 김 대통령은 해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사직동팀이 처음 설치된 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2년 6월이었다. 김현옥 내무부 장관 지시로 발족한 내무부 치안국 특수수사대 특수1대가 기원이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 이른바 ‘10·27 법난’ 때 승려들을 강제 연행해 고문한 곳이 특수수사대였다. 1983년엔 민간인인 한일합섬 김근조 이사를 고문하다 숨지게 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특수1대는 1983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사직동으로 이사하면서 ‘사직동팀’이란 별칭을 얻었다. 서울시가 사직공원 옆 어린이도서관의 건물 한동을 비밀스러운 경찰 조직에 빌려줬다. 사직동팀은 18년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굳게 닫힌 철문과 철창살 있는 하얀 담장이 공포의 대상이던 이곳은 어린이도서관 별관(문화관)으로 바뀌어 지금은 아이들이 책을 읽고 뛰노는 공간이 됐다.

사직동팀 해체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 그러나 민정수석실이 사직동팀 기능만 있는 조직은 아니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형 비리’는 누군가 감시해야 한다. 사직동팀 해체와 그 이후 과정엔 검찰과 경찰의 미묘한 갈등도 작용했다.

※ 다음 편엔 ‘사직동팀과 민정수석실’ 두 번째 이야기가 실립니다.

박찬수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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