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VIEW] “남조선” 대신 돌연 “대한민국” 꺼낸 북한

노석조 기자 2023. 7. 12.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식 담화에서 사실상 첫 사용
기존의 분단된 민족 관계 아닌 ‘국가 대 국가’ 개념 적용한 듯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노동신문 뉴스1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10~11일 연이틀 주한 미군 정찰기의 비행 활동에 대한 담화를 내놓으며 한국을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했다. 북한은 그간 평소에는 ‘남조선’, 비방할 때는 ‘괴뢰 정권’이란 표현까지 썼다. 그런데 사실상 처음으로 공식 담화에 한국의 정식 국가명을 사용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 정책이 ‘같은 민족이지만 정전협정으로 분단된 특수 관계’ 개념에서 같은 민족이라도 결국 남남이라는 ‘국가 대 국가(두 개의 한국·Two Korea)’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반도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가 아닌 미국과 풀겠다는 기존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의 변종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4월부터 남북연락사무소·군 통신 채널을 일방적으로 끊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거부 발표를 대남 기구가 아닌 외무성을 통해 한 것도 대남 정책의 큰 틀을 바꾼 후속 조치로 풀이된다.

김여정은 지난 1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밝힌 담화에서 “《대한민국》의 합동참모본부” “《대한민국》 족속”이란 문구를 썼다. 11일 담화에서는 “《대한민국》의 군부”라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강조 의미를 담는 용도인 ‘겹화살괄호(《》)’를 사용해 이번 대한민국이란 표현이 의도된 것임을 시사했다.

‘대한민국’ 또는 ‘한국’은 그동안 김여정 담화에서는 물론 그 밖의 북한 주요 매체나 공식 문건에서 볼 수 없던 표현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등 회담 관련 사항, 남북 합의문, 국내외 언론이나 제3자 발언 인용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대한민국’ 또는 ‘한국’으로 표현했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이번 김여정의 두 차례 담화와 같이 대남 비난 메시지 차원에서 ‘대한민국’을 언급한 것은 최초”라고 말했다.

11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U-2S 고공정찰기가 이륙하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11일 미국 공군 전략정찰기가 동해 배타적경제수역(EEZ) 상공을 침범했다며 이를 반복하면 군사적 대응 행동에 나서겠다고 재차 위협했다./연합뉴스

북한은 그간 남측을 보통 ‘남조선’ 또는 비난할 경우 ‘남조선 괴뢰’ 등으로 지칭해 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북한’이라고 쓴다. 우리는 북한을 ‘헌법상 우리 영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잠정적인 특수 관계 대상’으로 규정하고, 북한도 우리를 ‘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김여정이 이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위임’을 받아 발표한 담화에서 반복해 ‘대한민국’을 사용하면서 북한이 이제 한국을 ‘별개의 국가’로 보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남주홍 전 국정원 차장은 “문재인 정부 때 하노이 회담 결렬, 대북 제재 해제 시도 실패 등 각종 외교적 시도가 번번이 물거품이 되고 한반도와 국제 정세가 계획과 다르게 전개되자 북한의 정책이 협력을 통한 관계 변화의 모색에서 ‘적대적 공존’에 무게를 둔 ‘두 개의 한국’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이 같은 노선 변경은 ‘하노이 노딜’ 이후인 2019년 12월 제5차 당대회 때부터 조짐을 보였다. 남북 협상, 관계 개선이 아닌 무력 증강 등을 통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강대강 전략을 강화했다. 북한이 이듬해 6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대남 조직을 “싹 다 없애버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한국을 협상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사례라는 것이다.

이런 노선은 2021년 제8차 당대회에서 좀 더 뚜렷해졌다. 북한은 당시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 과업 수행” 문구를 삭제하고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을 실현” 등의 문구를 새로 넣었다. 이어 김여정은 지난해 8월 “우리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 같은 물건 짝과 바꾸겠다는 발상은 절대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라며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자”고도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김정은 정권이 김일성 정권 때부터 이어져 온 북한 주도의 통일 전략을 포기하고 ‘너희는 너희대로 살아라’식의 남남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8차 당대회에서는 비서국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온 대남 담당 비서 직책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됐다. 대남 업무 관계자들도 미·북 간 하노이 노딜 이후 줄줄이 ‘혁명화 교육’을 받거나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남 핵심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도 최근 모습을 감췄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남북 관계 의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조평통이 발표해 왔지만 2021년 제8차 당대회 이후에는 어떤 발표도 내놓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은 지난 1일 현정은 회장 측의 방북 계획에 대해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조평통 등 대남 기구가 아닌 국가 간 관계를 관장하는 외무성을 발표 주체로 내세웠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이 앞으로 ‘대한민국’ 표현을 계속 쓸지는 두고 봐야 한다”면서 “윤석열 정부가 통일부 성격을 재정립하며 퍼주기식 대북 지원보다는 인권·자유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와 국가 헌법에 기초한 대북 정책 의지를 밝히자, 북한도 이에 맞서기 위해 강경한 정치적 조치를 내놓은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