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맛과 섬] [146] 부산 구포국수
부산의 민요 중에 ‘구포다리는 걷는 다리요/ 영도다리는 드는 다리요/ 영감다리는 감는 다리요/ 새북(새벽)다리는 푸는 다리요’라는 가사가 있다. ‘구포다리 노래’라는 제목의 민요다. ‘영도다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구포다리’는 생소하다. 하지만 구포다리는 김해와 부산 사람들에게는 생활과 생계를 잇는 다리이며, 영도다리보다 2년 앞선 1932년에 건설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라며 ‘낙동장교(洛東長橋)’라는 명칭이 붙었다.
구포는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해 김해와 부산을 잇고 인근 지역을 오가는 교역 중심지였다. 당시 감동포라 불렸으며 한양으로 가져갈 조세를 보관하는 남창(南倉)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쌀을 도정하는 정미업이 발달했고, 제분과 제면 공장도 생겨났다. 이렇게 물산과 사람이 구포로 모여들었다.
구포국수가 널리 알려진 것은 6·25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모여든 피란민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메밀 대신 배급을 받은 밀가루를 국수틀에 넣어 면을 뽑아내 허기와 향수를 달랬다. 1960년대는 쌀이 부족해 분식 장려 운동으로 구포국수가 호황기를 누렸다. 결혼식 답례품으로 국수를 줄 만큼 인기가 있었다. 부산을 넘어 제주도에도 진출했고, 청와대에도 구포국수가 들어가기도 했다. 이 무렵 국수 공장이 30여 곳에 이르렀고, 낙동강 하구는 물론 집 옥상에서도 국수를 건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다와 강에서 불어오는 소금을 품은 바람은 ‘쫄깃하고 짭조름한 구포국수’를 만들고 인근 바다에서 잡은 좋은 멸치로 만든 육수가 더해졌다. 구포장이라는 소비 시장까지 갖추었다. 구포국수가 오래도록 명성을 이어온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제 주변에 공장이 들어오고 강 하구가 개발되면서 해풍과 강풍에 국수를 건조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교통 발달로 곡물 창고도 사라졌고, 대기업에서 대량으로 국수를 공급하면서 가내수공업으로 명맥을 잇던 구포국수는 밀려났다. 최근 남은 공장을 중심으로 구포국수가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으로 등록되어 새로운 계기를 맞고 있다. 구포시장에서 구포국수를 맛볼 수 있다. 여전히 착한 가격에 한 끼로 손색이 없는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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