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체코와 독일, 접경 도시에서 한달살기

안지숙 소설가 2023. 7.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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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소설가

얼마 전, 독일 접경지대인 체코의 도시, 데친에 숙소를 정하고 한 달을 살다 왔다. 한 달 중 열흘은 체코의 보헤미아 지역과 독일의 몇몇 도시를 둘러보는 그룹여행을 했고, 나머지 스무날은 자유로이 보냈다. 여행을 마치고 오자 여행 후기를 묻는 전화가 많이 걸려 왔다. 대부분 ‘여행’보다는 ‘한달살기’를 궁금해했다. 사실 내 여행의 출발점도 ‘타국에서 한달살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지난날 패키지의 여왕 소리를 들을 만큼 여러 곳을 쏘다녔지만 어디서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내가 어디 어디 갔다 왔노라는 지명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보고 느끼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실려 다니기보다 한 달간 한곳에 머물며 그 도시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항공권과 숙소비, 열흘 패키지 비용 등 다 합해 700만 원쯤 들어가는 ‘체코 한달살기’를 신청할 때 통장은 마이너스를 찍었지만 행복지수는 ‘만렙’을 찍었다.

그래서 한달살기는 해볼 만하더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한곳에 붙박여야 하는 한달살기는 별로였다. 열차 중앙역이 숙소 코앞에 있었지만, 마을 자체가 여름 한 철 장사를 기다리는 휴양지처럼 적막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었고 가게들은 문을 열 낌새가 없었다.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사흘을 보내고 나서 마을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느껴보겠다는 기대를 접었다. 빈집과 빈 가게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일행은 숙소를 벗어나 다른 나라, 다른 도시를 찾아 나섰다. 두세 명씩 어울려 부다페스트로, 잘츠부르크로, 빈으로, 파리로, 바젤로 열 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가서 며칠 지내다 다시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한 달 숙소비를 내고, 다른 도시에 머무는 만큼 숙소비가 또 들어갔다. 여행이라는 게 돈 써가며 불편한 사치를 경험하는 거라지만, 돈과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였다. 애초 가고 싶은 도시에 사나흘 머물다가 어딘가 가고 싶은 데로 바로 가는 배낭여행이 가성비 면에서는 훨씬 나았다. 물론 한 달간 머물 숙소가 어느 도시냐에 따라, 마을에 활기가 도는 시즌이냐 아니냐에 따라, 또 각자의 성향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데친도 체코와 독일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접경지대라는 매력은 있었다. 분단국가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웃 동네를 가듯 국경을 넘는 경험은 찌릿한 아픔을 동반하는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독일 마이센행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걸 당연한 일상처럼 여기게 된 내가 스스로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체코의 한 마을에서 독일로 폴란드로, 슬로바키아로, 헝가리로, 걸리적거릴 것 없는 바람처럼 들어섰다는 사실이 내게 베풀어진 세계의 환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동유럽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해 보리라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엘베(Elbe River)라는 신화를 내 몸속 가득 채우고 왔으니 후회는 없다. 엘베를 떠올리면 리젠산맥을 수원으로 체코 북부를 거치고 독일 동부를 흘러 함부르크 부근에서 북해로 흘러드는 강의 시간을 나도 같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좀 더 가까이 서서 좀 더 오래 엘베를 바라보다 올 것을. 비후의 울음처럼 내 심장의 박동에 섞여 들던 강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일 것을. 엘베를 그리는 마음은 열차를 타고 달리다 직관적으로 꽂히는 역에 내려 홀로 행군하듯 걸어 다녔던 마을과 개울로 나를 이끈다.

그뿐이겠는가. 드레스덴과 프라하의 압도적인 이미지, 바스타이와 천국의 계단 정상에서 느낀 환희는 지금 내 몸속에서 그리운 떨림으로 살아난다.


그리운 그 모든 곳에서 나는 눈부셨고, 행복했다. 술을 너무나 밝히는 한국여인 집에서 월세 사는 듯한 기분은 괴로웠고, 좁은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잠을 설쳐야 했던 K-하우스의 밤은 악몽이었으나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그마저도 됐다 싶다. 여행이란 가장 철없는 마음과 대책 없는 낙관으로 세계의 품에 날아드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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