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애국자요, 82세에 20년 뒤 보고 원자력 준비시켰으니까”[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3. 7.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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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공화국 대한민국8. 켈로부대 출신 94세 원자력 아버지 이창건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이 대한민국 1호 원자로 트리가 마크2(TRIGA MARK II) 앞에 섰다. 1929년생인 이창건은 30년 뒤인 1959년 대한민국이 도입한 이 원자로를 운전하며 대한민국 미래를 설계했다. 먹고살 일도 막막했던 1950년대부터 이들을 길러낸 지도자, 그리고 이들 전문가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아버지들이다. 서울 공릉동에 있는 트리가 마크2는 핵심은 다 해체되고 외형은 근대유산으로 지정됐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5aff52Ua-oU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 박사를 만났다. 1929년생으로 올해 94세다. 식민시대에서 해방, 근대화 시기와 21세기를 다 살아낸 역사다. 평안도 선천에서 내려와 배재고와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미군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에 근무한 뒤 평생을 원자력 개발에 바쳤다. 90을 4년 넘긴 전 원자력학회장, 현 원자력문화진흥원 고문은 겸손했다. 대화는 활기찼고 유머가 넘쳤다. 딱 두 차례 이 역사를 품은 과학자가 정색을 했다. 이승만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후쿠시마 처리수를 이야기할 때.

켈로부대의 추억

- 어떻게 현충일 기념식 때 한동훈 법무부장관한테 쪽지를 줄 생각을 하셨죠?

“내가 켈로부대원 자격으로 청와대에 갔었어. 사열을 받는데 가슴이 뭉클했어. 그런데 군악대 밴드 소리가 우리 대원들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생각나더라고. 님이 73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 가지고 ‘너 안다’고…. 북한에 가서 희생당한 우리 대원들 덕분에 내가 대통령한테 밥 얻어먹고 장관 옆에 앉은 거 아니오. 막 가슴 뭉클했지.”

- 켈로부대 입소한 이유는요?

“고향 선배가 있었어. 우리가 존경하는. 그런데 그 형 하숙집에 가면 이 사람이 막 뭘 감춰. 서울대에서 석산가 박산가 학위하던 형이야. 6·25 직전에 우리가 갔지, 저 형이면 이게 뭔지 알 거다 싶어서. 그랬더니 형이 하는 말이, 자기가 학비 벌려고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문서 번역 일을 한대. 그러면서 우리더러 전쟁 나면 뭐 할 거녜. 그 형이라면 우리가 껌벅 죽어. 그래서 전쟁 터지고 대구까지 찾아가서 입대했지.”

- 임무가 뭐였나요?

“주 임무는 기획장교였어. 대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그런데 휴전 직전에 대원들을 침투시켰는데 못 돌아왔어. 그게 가슴 아파. 집에서 샤워할 때 물줄기 소리가 걔들 울음소리처럼 들려. 통역도 했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는데, 한국에서 영어 제일 잘하는 미국 사람 언더우드가 국회 연설을 통역했어. 그런데 이러는 거야. ‘북한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셔서 남한을 정복하시려고 할 때.’ 높은 사람 왔다고 몽땅 존댓말을 써. 이래서 안 되겠다 해서 우리가 통역을 맡았지.”

켈로(KLO)부대는 미군이 운영을 맡은 대북 첩보와 공작 부대였다. 전후 켈로부대는 국군으로 상당수 흡수됐지만 그 실체를 미국도 한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창건은 지난 현충일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부 초청으로 기념식에 참석해 옆

자리에 있는 법무장관 한동훈에게 감사 메모를 남겼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 기념식에서 한동훈 법무부장관에게 쪽지를 건네던 이창건 박사./조선일보db

창고에서 시작된 원자력

- 왜 군에 남지 않았습니까?

“소령 줬으면 모르겠는데 나더러 대위 주겠대. 뭐 별로…. 그래서 그냥 복학했어. 졸업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공부는 영 못했어. 입학하자마자 전쟁 나고 대전, 부산에서 그냥 막 학교 다녔으니까. 누가 시험 있다고 해서 가보면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나는 현역 장교니까 권총 꺼내서 답안지에 그려놓고 ‘난 배운 거 없습니다’라고 썼어. 몽땅 D야. 등록금이 너무 밀려서 돈 마련하느라 겨우 졸업했어.

- ‘원자력 스터디 그룹’은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나요?

“현경호라고 우리 2년 선배가 계셨어. 전쟁 때 공군에 있었는데 서울공대, 문리대 우수 인력을 공군이 좍 끌어갔었어. 전쟁 끝나고 이 형을 길에서 만났어. 나더러 이래. ‘요새 뭐 하나?’ 일자리 찾는 중이라고 했더니 ‘자네 공부 좀 할래?’ 그러면서 언제까지 중앙청 옆 문교부 창고로 오래. 가봤더니 이미 (서울대 교수 출신 문교부 원자력과장) 윤세원 선생이랑 스터디 패거리를 만들어놨더라고. 그게 원자력 스터디 그룹이야. 공군 있을 때 미군이랑 원자력 세미나를 했었대. ‘원자력공학 입문’이라는 책이랑 ‘연구용 원자로’라는 책.” 현경호는 훗날 원자력학회장까지 지냈다.

- 전기공학 전공인데 낯설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12명인데 책이 한 권밖에 없잖아. 이걸 복사해야지? 그런데 다 내 선배들이야. 그래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지. 이걸 그냥~” 이창건은 기관총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쳤다고 했다. 다들 “다음부터 자네가 다 맡아!” 하더라고 했다. “다들 장교였으니까 부하들 시킨 거지. 나는 특수부대라 혼자 다 했거든. 영어도 그래. 밤에 북한에 침투한 대원들이 전문 보내는 거 기다리면서 영어책을 50권 읽었어. 그 실력으로 보고서를 쓰니까 또 나한테 다 시켜. 스터디그룹 할 때도 경무대에서 오는 서류들 다 내가 맡아서 했어. 그걸 몽땅 으다다다 하고 타자 쳐서, 하하하”

- 군에 남았거나 길에서 선배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무슨 큰일 날 소리. 내 선배들이 전부 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들이에요. 우리 원자력 1세대는 한국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고. 우리가 그걸 스터디 그룹이라고 그러는데 그 좌장이 윤세원 선생이에요. 스터디 세미나 끝나면 막 이래. ‘우리도 원자력법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어?’ 그러면서 미국 거, 영국 거, 일본 거 갖다 던져주고 작업하래. 또 ‘장기 계획을 세워야 되지 않겠어?’ ‘인력 양성은?’ 윤 선생이 다 준비한 거야.”

이창건이 말한 원자력 스터디 그룹 12명이 훗날 원자력연구소 창립 멤버가 됐다.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고 관공서 창고에서 시작한 자발적 연구 집단이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윤세원은 원자력연구소 만들려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빚을 져서 집까지 팔았다.

배고팠던 식민 시대, 그러나

이창건 고향은 평안도 선천이다. 6·25 전에 가족이 월남해 서울 상도동에 살면서 이창건은 배재고등학교, 서울공대를 다녔다.

- 식민지 기억은 어떠십니까.

“배고팠어. 내 키가 작잖아? 누님 셋은 커요. 나랑 아래 두 동생은 성장기 때 못 먹었어. 작아. 일본 친구들은 친했었어. 선천에서 우리 반에 1진이 있었어. 전학 오면 무조건 패는 전통이 있었지. ‘후쿠로 다다키’라 그러던가? 일본 애 하나가 전학 왔는데 자기가 유도 1단이라면서 안 맞겠다네? 이게 싸움이 돼서 경찰이 왔어. 그런데 우리를 사상범이라고 붙잡아 가는 거야. 어느 날 우리가 방공호를 파고 있는데 천황이 항복했대. 일본 애들이 다 도망갔어. 그러니까 애들이 그 유도 1단 죽이겠다고 작전을 짜는 거야. 그랬더니 우리가 정말 존경하는 김영철 선생님이 와서는 딱 한마디 낮은 소리로 이래. ‘넘어진 자는 밟는 거 아니야.’ 그 선생님 한국말하는 거 처음 들었어. 애들이 다 쫄아서 도망갔어.” 그러더니 이창건은 한참 침묵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 김영철 선생님이, 러시아군한테 잡혀서, 시베리아에서….”

- 집안도 고생하셨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한때 상해 임정에서 일했어. 일본이라면 이를 갈았어. 전쟁 때 파편 맞아서 반신불수가 됐는데, 악화가 되니까 링겔을 맞아야 했어. 그런데 링겔 바늘이 일제야. 바로 뽑아버리셨어. 그러고 돌아가셨다.”

- 일본이 미우시겠네요.

“그렇지 않아. 그때 그런 거 어떡하라고. 글로벌하게 살아야 살아지는 건데 지금 반일(反日)해서 어떻게 살자는 거지? 과거는 묻지 말자고. 이제부터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켈로부대 맷집으로 버틴 원자력

‘싸고 품질 좋은 전기’는 산업 발전의 근본이다. 이창건에 따르면 1년 중 정전 시간이 한국은 14분, 일본은 35분, 미국은 98분이다. 무엇보다 전기값이 물값의 70%다. 이창건은 이게 다 원자력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 1978년에 고리 1호기 발전소를 처음 만드셨잖아요?

“부지를 내가 선정했지. 그런데 답사 다니다가 동해안에서 해병대한테 걸렸어. 원자력연구소 출장증명서랑 신분증 보여줘도 부대로 끌고 가. 내가 아직도 평안도 사투리를 쓰잖아? 엄청 맞았어, 간첩이라고. 그렇게 경찰이랑 군인한테 네 번 맞았어. 그런데 내가 누구야? 켈로부대 장교야. 맷집으로 버틴 거지. 지금도 앞니랑 코가 내려앉아 있긴 해.”

- 고리 1호기가 가동될 때까지 별일 다 있었겠습니다.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생겼어. 1956년이야. 전쟁 끝나고 3년 뒤야. 그때 워커 시슬러라고,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이 왔어. 이승만 대통령께서 ‘8군에 시슬러라는 분이 오셨대지? 한번 경무대 오라고 그래’ 했어. 오니까 ‘여보, 전기가 없어서 죽겠는데 무슨 묘안이 없겠어?’ 그러니까 시슬러가 석탄이 든 나무 상자를 꺼내더래. ‘이건 석탄이고, 이 막대기는 우라늄이요. 이것이 타면 큰 오일 탱커 하나, 화차 30량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만큼 전기가 나는 묘책이 있는데 한국에서 할 수 있겠어요?’ 했다지. 그러니까, 시슬러가 정치가를 가지고 논 거예요. 이승만이 ‘여보 살려주세요, 그럼 그걸 어떻게 하는 거요?’ 한 거야. 시슬러가 이랬어. ‘석탄은 땅에서 캐내는 자원 에너지라 유한하다. 그러나 이것은 두뇌에서 개발하는 기술 에너지요. 캐면 캘수록 더 농도가 짙은 고급 에너지가 나온다. 내 보기에 한국 사람 머리가 좋으니까….’ 자꾸 꼬신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승만이 물었어. ‘그러니까 언제쯤 원자력 전기는 볼 수 있겠어?’ ‘글쎄요, 한 20년 후?’”

이후 이승만 정부는 국민소득 100불일 때 1인당 국비로 훈련비 6000달러씩 지출해 가며 미국으로 전문가 유학을 보냈다. 모두 238명이었다. 이창건도 그중 하나였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갑자기 이창건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이승만이가 82살이거든? 82살 때 20년 후를 위해서 우리를 훈련시켰어. 그 영감은 자기 당대에 덕 보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애국자예요. 그래서 2009년 말에 UAE에 원자로 수출했을 때 내가 국립묘지에 아들 데리고 갔잖아. 이승만 묘소 앞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할아버지, 그때 저희들 10년 동안에 238명을 훈련시킨 결과니까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십시오. 20년 후에 된다고 그랬는데 꼭 20년 만에 고리에서 원자력 발전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박정희 대통령 묘에 갔어. “각하, 우리가 중동 사막에 무궁화 나무 4그루(원자로 4기)를 심었습니다 신고합니다”, 턱 그랬다고.

그 밑에 가면 김대중 대통령이 있어요. 그때 원전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당에서 물고 늘어지니까. 근데 목포에서 김 대통령이 그랬어. ‘원자력을 안 할 수 없어, 부득이해.’ 그 얘기 한마디 때문에 원자력을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원자력이 지금 세계적으로 되고 있고 또 수출까지 했다고요.”

1962년 트리가 마크2 원자로 가동 기념 우표

금 선생이 똥 선생으로

“1961년 미국에 출장 중이었는데 경제사절단이 왔다. 단장이 고향 선배인 재무부차관 이한빈이었다. 갑자기 내 방으로 오더니 “서울을 빨갱이들이 뒤집은 모양이다, 망명 준비하자”고 하더라. 그런데 몇 시간 뒤에 “그게 아니라 혁명이란다”면서 가방을 풀었다. 5·16이었다. 이후에도 원자력은 변함없이 추진됐다.”

1959년 이승만이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는 박정희 때인 1962년 가동됐다. 이창건은 “이승만 때 황무지를 개간해서 씨를 심고 박정희가 물을 뿌려서 열매를 맺게 했으며 이후 이를 강력히 밀고 나갔다”고 했다.

“원자력연구소 월급은 다른 부서 3배였다. 그래서 우리처럼 어수룩한 사람도 자랑스럽게 훈련을 받았지.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더러 ‘금(金) 선생’이랬어. 몸무게만큼 금값 받는다고. 그런데 그 금 선생을 말이야, X 선생이 똥 선생으로 만들었거든? 나는 떠났지만 우리 후배들, 최소한 동(銅) 선생 대접은 받아야지. 기자 양반, 이거 제목으로 꼭 써주소.”

서울 공릉동 옛 원자력연구원이자 현 한전인재개발원에 남아 있는 트리가마크2 건물./박종인 기자

후쿠시마 괴담과 이창건

이승만이 시슬러를 만난 1956년부터 1978년 고리 1호기 상업 가동까지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으나, 이를 다 쓸 여유는 없다. 그사이 대한민국은 초능력을 발휘해 오늘날까지 왔다. 대한민국을 떠받친 그 아버지들은 많은 이들이 하늘로 갔다. 이제 이창건도 역사가 되려고 한다.

그 역사가 말했다.

“그 요새 신문마다 후쿠시마 물 방출하는 것 때문에 말이 많은데, IAEA가 이런 문제가 나면 세계 최고 권위자들을 모셔다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요. IAEA 직원이 아니라 세계 최고 전문가들을 소집한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IAEA의 결정은 세계 최고의 결정이에요. 나도 IAEA 전문가로서 한번 아프리카에 간 일이 있어요. 자기 몸에 동위원소를 주입해 실험한 론도라는 동위원소 박사와 나. 론도는 아프리카 어딜 가도 다 알아. 나는 왜 갔냐. 이창건이는 세계적인 학자가 아니야. 그런대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최고가 된 최우수 국가거든. 그 노하우를 가지고 간 거야. IAEA는 그렇게 사람을 뽑아서 한단 말이오. 직원을 보내는 게 아니라고. 근데 그걸 못 믿겠다니, 누구 말을 믿겠다는 거요?”

이창건(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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