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아이콘’ 삼성 전·현직 CEO들, 청년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입사 초부터 ‘사장’이 목표였습니다. 소위 SKY를 나오지도 못했고 집안 형편도 어려운 ‘참 가진 것 없었던 사람’인 제가 성공할 비결은 일뿐이었기 때문이죠.”
‘갤럭시 성공 신화’의 주역이자 대표이사를 지낸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이 11일 펴낸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에 담긴 내용이다. 308페이지짜리 책에 그가 평사원에서 시작해 사장에 오르고 거대 기업을 이끌면서 겪었던 경험과 노하우, 조언을 담았다. ‘적을 편으로 만드는 두 가지 방법’ ‘판단력이란 밀고 나가는 힘이다’ ‘불평 말고 (문제 해결이 가능한) 컴플레인을 하라'와 같은 식이다. 그는 “38년간 조직 생활에서 고민하고 실천했던 경험과 나름의 노하우를 나누고자 쓴 책”이라고 했다.
고 고문의 출간은 황창규 전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전 KT 회장)이 지난달 ‘황의 법칙’(시공사)이란 책을 펴낸 지 한 달 만이다. 그도 “삼성전자와 KT 등에서 30여 년간 조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배움과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다”며 책을 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 출신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렇게 잇따라 대중 앞에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경계현 대표이사도 작년 7월부터 유튜브에서 ‘위톡(We Talk)’이란 이름으로 리더십, 경영 철학, 조직 문화 관련 내용을 방송하고 있다. 삼성 안팎에선 “과거 은둔의 아이콘으로까지 여겨졌던 삼성전자 CEO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가진 것 없으면, 시간 관리부터 시작”
삼성전자 전 CEO들의 책엔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삼성맨’의 솔직한 자기 고백과 통찰이 담겨 있다. 성균관대를 나와 삼성 CEO가 된 고 고문은 “쟁쟁한 명문대 출신에 유학파, 박사가 가득한 곳에서 학부 졸업생으로 입사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절실함을 갖고, 성실히 일하는 것뿐이었다”며 “학벌도 떨어지고, 능력도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어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시간, 정확히는 시간 관리부터 출발하라”고 했다. 퇴근 전에는 늘 다음 날 할 일을 시간 단위로 정리하는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만들어보라는 조언도 했다.
고 고문은 2006년 한쪽 귀의 청력을 잃고, 아내에게 ‘퇴사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사실도 공개했다. 그는 “뭔가 포기하고 싶을 때면 이름 석 자를 끊임없이 되뇌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고동진, 여기서 그만둘 거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너 진짜 여기까지야?’”라고 썼다. 그는 결국 2015년 사장이 됐다.
“일 잘하는 사람의 창의력은 머리가 아닌 현장을 뛰는 ‘발’에서 나온다” “똑똑한 사람은 일을 이끌지만, 배려하는 사람은 조직을 이끈다” “일이 닥쳤을 때 실체가 막연한 감정인 ‘불안’과 개선할 수 있는 문제인 ‘불편’을 혼동하지 말라” 같은 내용도 모두 고 고문의 30여 년 경험에서 나왔다.
직장인들의 일 문화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도 있다. 황 전 회장은 “젊은이들이 ‘워라밸’이라는 일과 삶의 밸런스에 집중하다 더 큰 걸 잃을까 염려한다”며 “자신의 한계와 대면하고 이를 극복해내는 시간은 결코 삶의 균형만을 추구하는 이가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고 고문도 “일과 삶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늘 함께 갈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세트”라며 “회사뿐 아니라 집에서도, 일할 때뿐 아니라 일하지 않을 때도 목표를 생각하고 추구하며 노력하는 것이 저의 ‘워라밸’”이라고 했다.
그는 또 “3~6개월 동안 나는 별다른 일 없이 머물러 있고, 주변 동료들은 바삐 움직인다면 스스로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 않은지 점검해보라”는 조언도 했다. 회사 내에서 3~6개월간 TF(태스크포스) 파견, 별도 프로젝트처럼 새롭고 도전적인 일, 특별한 과업같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기회가 부여되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라는 것이다.
◇”기본은 성과, 최선은 과정일 뿐 최고로 증명”
‘성과주의’에 대한 강조도 곳곳에 담겨 있다. 고 고문은 “보통 노력이라고 하면 ‘열심’ ‘성실’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지만 결실 없는 성실은 무의미하다”며 “일의 기본은 성과다. 최선은 과정일 뿐 최고로 증명하라”고 했다. 앞서 권오현 전 회장도 ‘초격차’(쌤앤파커스) 시리즈를 통해 “신임 임원이 됐을 때 ‘직장이냐, 가정이냐 선택하라’며 야근을 강요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회사가 임원에게 원하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실력을 늘리는 것”이라며 “임원들은 여러 부서 보고를 받으면 자기 실력이 향상됐다고 착각하는데 중요한 건 회사 내에 없는 지식을 쌓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권 전 회장의 책에서는 ‘똑부론’이 화제를 모았다. “대기업에선 ‘똑게(똑똑하게 게으른 경영자)’, 중소기업에선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경영자)’가 이상적인 경영자다. 대기업에선 미래 통찰력과 판단력은 우수하지만, 권한은 부하 직원들에게 과감하게 위임하는 스타일이 좋다. 반면 인력과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선 리더가 똑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영자는 ‘해야 할 일 목록’을 만들 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일 목록’을 만들어,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시간을 벌라”고 조언했다.
삼성 반도체 총괄 대표이사인 경계현 사장도 유튜브를 통해 “리더는 자신의 노하우를 강요하지 말라” “일하면서 생길 수 있는 감정 노동은 리더들이 먼저 나서서 풀어라” 같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하는데, 일부 영상은 MZ세대 직장인들의 큰 호응을 얻으면서 30만 이상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은둔에서 전면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 나선 CEO들
과거 삼성전자 CEO들은 외부에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내에서도 회사 정보가 새어나갈까 봐 불편해 하는 시선들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삼성뿐 아니라 주요 대기업 현직 CEO들이 직접 대학을 돌며 인재 유치에 나서는 등 분위기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현재 임직원 다수를 차지하는 MZ세대뿐 아니라, 미래 고객이자 직원인 알파세대(2010년 이후 출생)와도 소통하지 못하면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삼성 CEO들이 리더십과 경영, 일하는 법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것은 기업 차원의 이미지 제고와 인재 유치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사회적으로도 큰 이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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