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 칼럼] 윤 정부, 북 신호에 응답할 수 있어야

이중근 기자 2023. 7. 12.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 측의 기밀문서 해제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구소련과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 있었다. 당과 정부 내에 관료주의가 팽배해 흐루쇼프의 쿠바 핵무기 배치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군 수뇌부는 울창한 야자수 숲이 핵미사일의 이동을 가릴 것이라고 했지만, 정작 야자수는 15m마다 한 그루씩 드문드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문제점이 확인되었는데도 흐루쇼프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고 권력자가 결정한 이상 누구도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소련은 물론 전 인류의 운명을 가를 위험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미국의 U2 정찰기가 이를 탐지하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에 철수를 요구했고, 그 이후 과정은 다 알려진 바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전에는 케네디의 강단 있는 대응만 칭송받았지만 이번엔 흐루쇼프의 솔직한 실수 인정과 결단이 위기를 막았다고 필자들은 평가했다(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5·6월호).

이중근 논설고문

윤석열 정부를 보면 대북 강경책과 압박만이 북핵을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 같다. 얼마 전 만난 안보실 핵심 관계자도 “북한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기 전에는 대화 제의는 없다”고 했다. 대중국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다른 당국자는 “중국을 상대로 (한국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신냉전의 흐름으로 볼 때 미·일 등 한쪽에 어차피 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깔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의 방중에서 보듯, 미국도 중국과의 완전한 디커플링은 생각하지 않는다. 미·중의 완전한 분리, 궁극적인 적대는 가능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처럼 가치 외교와 반북만 외치다가는 한국만 외톨이가 될 수 있다. 보수가 그토록 싫어하는 통미봉남에 통일봉남까지 당할 수 있다.

역대 어느 정권도 윤석열 정부처럼 남북관계의 기본 규칙과 외교 문법을 무시하지 않았다.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려야 통일할 수 있다”는 식의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말은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보수당과 정부가 오로지 미·일 공조에 반북, 반중의 상황 대응 기조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한다. 과거 이명박 정부가 ‘북한 조기붕괴론’의 망상에 기댔다 망한 전례를 보는 듯하다. 북한을 적인 동시에 대화의 상대라고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은 군인 출신 노태우 정권이다. 노 대통령이 윤 대통령보다 북한 실체에 더 어두웠을까?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이틀 연속으로 “미 정찰기들이 북측 경제수역(EEZ) 상공을 침범했다”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으로 가는데 누구도 평화적 해법을 말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통일부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고 전 정부를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이라고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나. 흐루쇼프의 쿠바 위기 때처럼 합리적인 의견이 제시되지 못하면 정책은 일방으로 치닫게 된다. 윤 대통령은 외교안보 정책을 다뤄본 경험이 전무하다. 그런데 다분히 즉흥적인 것 같다. 게다가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 목을 매고 있다.

쿠바 위기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85세 때 다큐멘터리 영화 <the fog of war(전쟁의 안개: 맥나마라의 11가지 교훈, 2003)> 출연에 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외교안보 정책 결정자들이) 한번 실수하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어 교훈을 남기고자 한다.” 당시 미국은 쿠바에 핵무기가 없다고 생각해 공습을 고려하고 있었다. 자칫 오판으로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뻔한 것을 나중에야 안 것이다. 맥나마라는 당부한다. “첫째,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고, 다음은 “적을 다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쿠바 위기를 넘긴 결정적 순간, 토미 톰프슨 주러시아 미국대사가 한 말을 전한다. “러시아를 믿을 수 없다”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톰프슨은 말한다. “러 온건파의 신호에 응답하세요.” 적국이지만 그들과 부단히 접촉한 덕에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북한이 당장 대화 신호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악화돼 있다면 다른 생각도 할 법하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윤석열 정부는 북한이 대화 신호를 보내도 읽어낼 수 없다.

이중근 논설고문 haruba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