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배기까지 ‘닥치고 수학’… 학교가면 ‘수포자’로
초등교 입학전 71% 수학 사교육
유명 수학학원 가려고 한글 배워
“의대 쏠림에 ‘닥수’ 점점 심해져”
서울 강남에는 “A학원 A반 합격을 보장한다”는 ‘유치원생의 일타강사’도 있다. 이들은 한글을 빠르게 떼줄 뿐만 아니라 수학 문제지에 나오는 긴 문장을 이해하는 연습도 시킨다. 영훈 군은 이 과외를 받았다. 한글뿐만 아니라 수학도 따로 입학시험 대비 과외를 받았다. 덧셈 뺄셈은 기본이고 나무 쌓기, 도형 규칙 등 ‘출제 유형’에 대비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섯 살에 A반에 합격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는데 최근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지역 학부모들 사이에서 자녀의 ‘A학원 A반 합격’은 곧 ‘엄마의 점수’로 통한다.
다섯 살 영훈 군은 화장실에 혼자 가는 게 무서운 나이였다. 하지만 이제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놀지 말고 물만 마시라”는 학원에 익숙해졌다. 그러는 사이 영훈 군은 A반에서도 소수만 뽑는 ‘챌린지반’, 더 극소수만 뽑는 ‘프리미어반’으로 ‘레벨 업’했다. 영훈 군은 A학원 말고도 다른 수학 학원에도 다니고, 따로 수학 과외도 받는다. A학원의 방대한 진도와 과제를 따라가기 위해서다. 학원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하위 반으로 ‘강등’된다.
대치동 같은 사교육 과열 지구에서 영훈 군처럼 공부하는 것을 요즘 ‘닥수(닥치고 수학)’라고 한다. 축구의 ‘닥공(닥치고 공격)’에 빗댄 것. 수학 사교육은 영어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유아 때부터 시작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심화된다. 동아일보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초1 자녀를 둔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5월 16∼29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초교 입학 이전에 수학 사교육을 처음 시작한 비율은 70.6%로 영어(61.3%)를 앞섰다.
4세부터 수학학원 가려고 한글과외… 학교 가면 “수학 제일 싫어”
취학전부터 대치동 수학학원 ‘고시’… 학원들 “의대 보장” 학부모 유혹
‘대치동 거주’ 등본 제출 요구도
초등생엔 ‘수학의 정석’ 가르쳐
‘고등수학(상) 16회 완성’ ‘중등 대수 심화 8회 완성’ ‘대수, 정수, 기하 영역별로 원데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초등생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B 씨는 하루에도 몇 개씩 학원 광고 문자를 받는다. 여름방학 특강을 신청하라는 것. 학원들은 “방학이 진도를 빨리 뺄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학원들은 많게는 ‘하루 3, 4시간씩 주 5회’ 방학 수학특강 스케줄을 운영한다. 한 학원은 “우리 아이들, 여름방학에 놀고 싶은 것 상상하며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더 큰 미래를 선물해 주기 위해 수학 몰입 특강을 준비했다”고 내걸었다.
B 씨의 자녀는 아홉 살, 초3이다. 학교 교과서에서 ‘피자를 똑같이 3조각으로 나누고 2조각을 먹었다면 분수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를 처음 배우는 시기다. 하지만 ‘대치동 초3’은 이 나이에 초등 수학을 모두 끝내버린 경우가 많다. 초4에 중학교 과정을 마무리하고 초교 졸업 전에 ‘수학의 정석’을 푸는 사례도 적지 않다.
● 4, 5세부터 시작되는 수학 사교육 사다리
문제는 기본 개념만 배우면 되는데 ‘심화와 선행’으로 왜곡된다는 것이다. 경시대회나 영재교육원 준비, 의대 입시 준비를 위해 중학교와 고교 과정을 빨리 마치고 아이들이 ‘더 어려운 문제’를 계속 풀도록 시킨다. 이런 심화와 선행의 정점에는 C수학학원이 있다. 사교육 과열 지역의 대다수 학생은 초2, 초3 때 ‘C고시’라고 불리는 학원 입학시험에 몰두한다. C고시는 이 학원의 지점이 있는 전국에서 같은 날 치른다. 시험날이면 대치동 지점 일대 교통이 마비된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해 학원에 들어가면 빠르면 초3에 중학교 과정, 초4에 고교 과정을 시작한다.
최근에는 글을 이해하는 문해력이 중요해지자 ‘독해력 수학’ 프로그램을 내건 학원들도 있다. 이들은 아직 발표도 안 된 202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개편안에 ‘서술형 문제’가 많이 담길 거라며 학부모를 유혹한다.
● 결국은 ‘의대’… 학부모들 경쟁심 자극
이 같은 ‘닥수’는 수학이 곧 대입, 사회에서의 성공과 연결됐다는 인식 때문이다. 수능에서 수학 점수가 높으면 다른 과목을 잘 보는 것보다 표준점수에서 유리하다. 수능에서 절대평가인 영어 영역을 4등급 받아도 수학을 잘하면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다.
‘내 아이는 반드시 의대에 보내고 싶다’는 욕망도 이런 현상의 배경이다. 경쟁 사회에서 ‘의치한약수’(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만큼 ‘확실한 성공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주요 의대는 수능 성적 상위 1%여도 합격을 장담하기 어렵다. 한 수학학원은 “수능 수학 출제 범위는 정해져 있는데 최대한 반복해서 가르치면 잘할 수밖에 없다. 과학고, 영재학교도 대비하고 의대도 합격시킨다”고 홍보한다. ‘초등 의대반’이 유행한 지는 이미 오래다.
‘닥수’를 경험한 아이들 중 상당수는 과도한 선행학습과 문제 풀이로 수학에 흥미를 잃고 오히려 질려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학부모가 먼저 아이를 ‘선행과 심화의 열차’에서 도중에 내려주기는 쉽지 않다. 대다수 부모는 아이의 스트레스를 지켜보면서도 수학 사교육을 계속 끌고 나간다. 한 학부모는 “수학 경시대회에서 입상이라도 하면 아이 이름이 학원 벽 플래카드에 붙는다. 상위권 반은 교실도 높은 층에 있어 은근히 학부모들의 경쟁심과 자존심을 자극한다”며 “어릴 땐 수학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던 아이가 이제는 학원에 갈 때마다 ‘수학이 제일 싫다’고 한다”며 씁쓸해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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