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으로 집을 떠날 때 딱 한 가지만 챙겨야 한다면?

조일준 기자 2023. 7. 1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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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미그란스]사진작가 브라이언 소콜과 유엔난민기구가 난민에게 물어본 ‘가장 중요한 것’
피란길에 챙긴 코란·악기·공책·초상화·약혼녀 사진, 그리고 나의 이야기
시리아 난민 오마르는 피란길에 가져온 부주키를 연주하며 향수를 달랜다. © UNHCR/Brian Sokol

‘무인도에 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것 몇 가지’ 이야기는 식상할 만큼 많다. 개인의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다양할 테지만, 대개는 막연한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절박한 상황이 현실로 닥쳐온 이도 많다. 난민을 비롯한 강제이주자들이 그렇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닥쳐온 공포 속에서 급하게 피란을 떠나는데 딱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둠을 밝혀줄 ‘태양전지판’ 한 장

브라이언 소콜은 전세계 난민 수백 명에게 그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다. 소콜은 미국 태생의 사진작가다. 세계의 인권 문제와 인도주의적 위기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의 작업에서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유엔난민기구(UNHCR)와 협업한 ‘가장 중요한 것’(The Most Important Thing)이라는 장기 프로젝트다. 2012년부터 아프리카·아시아·중동·라틴아메리카의 난민, 국내 실향민, 무국적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이제 막 난민 캠프에 도착한 이들이 들려주는 답변은 비극과 희망이 뒤섞여 있어 더 뭉클하고 애잔하다.(나이는 모두 인터뷰 당시 기준이다.)

하파자(60)는 미얀마 남서부 라카인주의 소수민족 출신이다. 어느 날 무장 괴한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 그의 가족은 집 밖에 있었다. 집에 들를 틈도 없이 피신해야 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웃들의 주검이 널린 들판 건너편 숲에서 집이 불길에 휩싸이는 걸 보았다. 하파자는 사흘을 걸어 국경을 넘었다. 그의 손에는 태양전지판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단 1분이라도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돈을 가져왔을 거예요. 우리 가족에게는 50만차트(약 31만원)가 있었는데, 모두 잃었습니다.” 접경국 방글라데시의 난민 캠프에 온 하파자는 “밤이면 불빛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요리도 할 수 있기 때문에 태양광이 중요하다. 불이 켜져 있으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저는 땅과 돈, 집을 잃었지만 상관없어요. 아직 남편과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운이 좋지 않았죠.”

전쟁과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은 난민들이 긴박한 피란길에 소중하게 챙겨온 물건은 다양했다. 미얀마 난민 하파자가 태양전지판을 든 모습. © UNHCR/Brian Sokol

도울라(22)는 제2차 수단 내전(1983~2005)으로 마을에 폭격이 반복되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그가 가져간 물건은 평형저울처럼 생긴 물지게였다. 긴 막대의 양족 끝에 바구니를 매달고 가운데 부분을 어깨에 걸치는 운반 수단이다. 그는 남수단의 난민 캠프까지 열흘을 걸었다. 아이들이 지쳐 걸을 수 없을 때면 이 지게 바구니 양쪽에 번갈아 아이들을 태우고 한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리아 난민 이만(25)은 유서 깊은 고도이자 내전의 격전지였던 알레포를 떠나 튀르키예로 국경을 넘었다. 두 아이를 데려오는 길은 험난했다. 피란길에서 5명의 친척을 잃었다. 사방에 폭격과 죽음이 널린 재앙 속에서 이만이 챙겨온 것은 이슬람 경전 코란이었다. 그는 “코란을 가지고 있는 한 저는 신과 연결돼 있다. 신이 나를 보호해준다”고 믿는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살던 오마르(37)도 이웃들이 목숨을 잃던 날 밤 집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의 난민 캠프에 가져온 물건은 전통 현악기 부주키(기타처럼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류트의 일종)였다. 오마르는 “부주키를 연주하면 향수에 젖고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잠시나마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열세 살 소녀가 챙긴 한 권의 공책과 펜

피델린(13)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 당시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인접국 콩고로 피신했다. 한 사업가가 즉결처형되는 것에 충격을 받고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달려갔다. 가족은 그길로 집을 나섰다. 열세 살 소녀가 긴박한 상황에서 챙긴 것은 한 권의 공책과 펜이었다. “책가방과 신발, 여러 색깔의 머리 리본은 가져올 수 없었어요.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었어요.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소녀 피델린의 공책. © UNHCR/Brian Sokol

이 밖에 가족 5명이 탈 수 있는 오토바이, 세례 선물로 받은 성경, 삶의 희망을 주는 염소, 가족의 음식을 짓는 냄비, 피란길에 오른 7살 때 아버지가 춥지 말라고 벗어준 양복 재킷, 102살 노구를 지탱해주는 지팡이를 꼽은 이도 있었다.

브라이언 소콜은 이제 막 고향을 떠나온 난민뿐 아니라, 길게는 50년 가까이 타국살이를 한 이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앙골라 내전(1975~2002) 때 고국을 등지고 인접국 콩고민주공화국(DRC·민주콩고)으로 온 난민들은 고향 집을 떠나올 때 가져왔던 그 ‘한 가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 물건도 다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루모나(36)는 10년 전 친구가 자기 얼굴을 그려준 초상화가 보물 1호다. “이건 사진이 아니라 예술 작품입니다.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나를 그려줬어요. 나뿐 아니라 그림을 보는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해줄 거라 확신해요.” 이사벨(53)은 민주콩고의 수도 킨샤사에서 노점상을 하며 여섯 아이를 키운다. 그는 조그만 얼룩말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를 꼽았다. “또다시 피란을 떠나야 한다면 이걸 가져갈 겁니다. 킨샤사에 있는 내 작은 방을 떠올릴 거예요.”

20대 청년 카캄바는 어렸을 때 마체테(주로 정글 벌목용으로 쓰이는 큰 칼)를 들고 집에 들이닥친 무장 괴한들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어린 그는 뜨거운 기름 팬에 앉혔다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민주콩고(당시 자이르)의 국경을 넘고 있었다. 정신적·신체적 충격이 워낙 컸던 탓에 그는 지금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은 인터뷰 당시 임신한 약혼녀의 사진이었다. “이곳 풍습으로는 임신한 여성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출산하길 기다렸다가 결혼할 겁니다.”

앙골라 청년 카캄바의 약혼녀 사진. © UNHCR/Brian Sokol

내가 겪은 고통, 아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에드워드(73)는 다섯 살 때 내전의 참화를 피해 50년 넘게 타향살이했다. 인터뷰 당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무엇을 가져갈 거냐는 물음에 그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두 손이면 됩니다. 한 손은 마체테, 다른 손은 괭이를 쥘 겁니다. (우리를 품어준) 민주콩고 사람들의 환대가 그립겠지만, 옛날 내 아버지가 일했던 바로 그 땅에서 일할 생각에 행복합니다.”

안토니오(53)가 털어놓은 비극은 충격적이다. 그는 12살에 온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뒤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한때 철부지 병사 150명을 이끌었는데, 그중에는 6살짜리 코흘리개도 있었다. “저는 군인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런 일(살상)을 했습니다.” 두 번의 전투 뒤 탈영해 자이르 국경을 넘고 나서야 새 삶을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자기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제 가족은 죽었고 저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제 삶이 어땠는지,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지금은 왜 집에 돌아갈 수 없는지를 보라고 말해줍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배우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꼽은 안토니오. © UNHCR/Brian Sokol

난민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것’의 종류와 이유는 다양했지만, 공통점도 있다. 첫째, 값나가는 귀중품이 아니라 피란길에 오르기 전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생활형 혹은 생계형 소품이었다. 이는 대다수 난민이 정치·경제적으로 취약한 빈국에서 생기는 까닭에 이렇다 할 재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 급박한 비상사태로 그나마 귀중품도 챙길 여유가 없는 사정과 관련이 깊다. 둘째, 일생에서 기념할 만하거나 특별한 추억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셋째, 가족이나 친구(연인)처럼 가장 힘든 시기에 위로와 힘이 되는 ‘사람’의 체취였다. 당장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서도 난민들은 하나같이 ‘가장 중요한 것’에 강렬한 삶의 의지와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투사하고 있었다.

세계에는 전쟁, 자연재해, 폭압적인 정권, 소수자 박해 등 여러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 삶터를 떠나야 했던 이가 1억 명이 넘는다. 2023년 6월 유엔난민기구가 발표한 ‘글로벌 동향 보고서’를 보면, 2022년 현재 강제로 집을 떠난 사람은 약 1억800만 명으로, 전년에 견줘 1900만 명이나 늘었다. 역대 최대 증가폭이다. 난민 수가 1억 명을 넘어선 것도 역사상 처음이다. 강제이주자 중 3530만 명은 자국의 국경 밖으로 피신한 난민, 6250만 명은 자국 내에서 터전을 잃은 국내 실향민이다. 난민 대다수는 접경국으로 피신한다. 2022년 현재, 세계 난민의 최대 수용국은 터키·독일·파키스탄·우간다·러시아·폴란드·수단·방글라데시·에티오피아·이란 순이었다. 난민 발생국과 거리가 먼 독일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223만여 명의 난민을 수용한 것이 돋보인다. 폴란드도 100만 명 넘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였다.

친구가 그려준 초상화를 든 루모나. © UNHCR/Brian Sokol

한국 난민법 10년, 인정률은 세계 꼴찌

2023년 7월1일은 한국이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앞서 6월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한국은 난민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나라로 손꼽힌다. 2014년 1월부터 2023년(5월 말 기준)까지 10년 동안 한국에 온 난민 신청자는 8만5105명. 그중 심사 완료자는 4만7897명,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것은 987명뿐이다. 난민 인정률이 2.06%로, 세계 평균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꼴찌 수준이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7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의 난민 인정률은 24.8%, 보호율은 63%에 이른다.

세계난민의 날이던 2023년 6월20일, 난민인권네트워크·공익인권법재단·노동계·종교계 등 국내 160여 개 인권단체는 ‘난민법 제정 10년, 법무부는 난민 보호의 책임을 다하라’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어렵게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한국 땅을 밟기도 전에 돌려보내기 바쁘고, 부실심사 지시, 체류자격 박탈, 난민들에 대한 일부의 혐오정서에 기대어 시작된 난민법 개악을 현재까지도 추진하며 난민 신청의 권리를 제한하려 바쁘다”고 정부의 난민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난민법 개정 철회 △모든 난민 신청자에 대한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 △난민과 인도적 체류자의 정착 대책 마련 △체류제한·추방·강제구금 중단과 기본적 삶의 권리 보장 등을 촉구했다.

조일준 <한겨레> 선임기자 iljun@hani.co.kr

*호모 미그란스: 조일준 <한겨레> 선임기자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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