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킬러 괴담’에 번번이 흔들리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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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계획과 관련해 "한국민들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일본 정부가 왜 원전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려는지, 수산물은 안전한지 알지 못하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이럴 때 국제기준과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담'이 생겨난다.
한국 사회에서 '괴담 논란'이 되풀이되는 건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믿고 따르는 '신뢰자본'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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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한 ‘신뢰자본’ 되살려 혼란 막아야
시민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풀어주는 건 전문성을 갖춘 과학자와 정부, 국제사회의 몫이다. 일본 정부는 방류 절차의 안정성을 설명할 의무가 있고, 원자력 전문가들이 포진한 IAEA는 일본 정부의 계획을 검증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측면에서 내부 이견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검증 결과를 자신했지만, 2박 3일 방한 기간 IAEA 검증 결과나 공신력을 공격하는 이들까지 설득할 순 없었다.
국민 건강은 작은 위험만 있어도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때 국제기준과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담’이 생겨난다. 괴담은 소문으로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강에 대한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을 악용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공격하는 ‘킬러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8년 뉴욕타임스(NYT)는 1980년대 이후 구소련 당국 등이 유포한 수십 개의 허위 뉴스 사례를 분석하고 괴담에는 공통된 ‘각본(playbook)’이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괴담 공작의 첫 번째 단계는 건강, 성 정체성, 인종 등 사회적 갈등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이슈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거대한 거짓말(big bold lies)’을 꾸며낸다. 이 괴담을 ‘진실의 조각들’로 감싸 그럴듯하게 만들고 괴담을 대신 퍼뜨려줄 ‘유능한 바보(useful idiot)’를 찾아낸다. 구소련은 이런 식으로 ‘흑인과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미국 군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는 ‘AIDS 음모론’을 6년간 세계 80여 개국에 퍼뜨렸다.
이 보도를 기획한 애덤 엘릭 NYT 오피니언 동영상 책임 프로듀서를 5년 전 뉴욕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광우병 사태가 ‘괴담 각본’에 포함된 ‘국민 건강’이라는 민감한 이슈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흥미로워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2016년 사드 배치 논란의 출발점은 서로 달랐지만 ‘국민 건강이 위태롭다’는 극단적 시나리오의 종착역은 같았다. ‘광우병 소’ ‘전자파 참외’ 같은 먹거리 괴담은 공포를 실어 날랐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괴담은 결국 현실이라는 검증의 벽은 넘지 못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그때보다 더 많이 팔리고, 성주 참외는 올해 사상 최대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괴담 논란’이 되풀이되는 건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믿고 따르는 ‘신뢰자본’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괴담을 걸러낼 공신력 있는 전문가집단, 독립위원회 등 사회적 여과장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야당 정치인과 민간단체들이 일본까지 날아가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을 제기하더라도 과학적 기술적 근거와 국제적 기준에 따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팻말과 구호만으로는 ‘국내 정치용 괴담’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렵다.
반복되는 ‘괴담 논란’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애꿎은 자영업자, 농민, 어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괴담으로 이득을 보려는 세력에게 ‘한국은 흔들면 흔들리는 만만한 나라’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원전 오염수 방류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만큼 허약한 신뢰자본을 되살리는 일도 중요해졌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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