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장 무너집니다”…유럽보다 센 ‘규제’에 원료등록만 수억 中企 하소연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따르면 유해화학물질 영업을 하려는 기업(50인 이상)은 기술인력 1명을 의무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 입장에서 화공·가스·산업안전 등 안전과 관련한 기능장·기사·산업기사 자격증을 가진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B사 대표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대기업으로 몰리고 소규모 기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게 현실”이라며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기술인력 인정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부의 과도한 화학물질 규제 탓에 국내 화학소재 분야 중소기업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강화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관법’이 중소기업의 경영 활동을 옥죄는 ‘킬러 규제’로 변질된 탓이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미국 무역대표부(USTR)도 지난 3월 말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에서 화관법과 화평법 등을 한국의 대표적인 무역장벽으로 꼽았다. 한국에 진출한 자국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에 취약할 뿐 아니라 규정 이행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부족하다고 미측은 지적했다. 한미간 통상 분야에서 이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화평법·화관법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심사·평가해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할 때 종합적 안전관리 체계를 만들기 위해 입법됐다. 하지만 소품종·대량생산 위주인 대기업과는 달리 다품종 제품을 취급하는 중소기업에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양수 한국염료안료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대량 사용되는 물질일수록 해외에 시험자료가 충분하지만 1t 미만으로 사용되는 물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시험 자료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며 “유럽이나 일본이 신규화학물질 등록기준을 1t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일본·유럽(EU)·미국 등보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이 강하다. 화평법의 모태이자 가장 선진화된 화학물질 관리체계로 평가되는 유럽연합(EU)의 ‘신화학물질 규제(REACH)’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연간 1t 이상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10t으로 훨씬 기준이 완화돼 있고,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도 1t 이상이 규제 대상이다.
유독 한국만 이 기준을 0.1t 이상으로 하고 있다. 기존 화학물질도 기업들이 직접 정부에 등록하도록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한국과 유럽 뿐이다. 미국, 일본, 중국은 정부가 직접 시험·평가를 하고 필요할 경우에만 기업에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체제다.
선진국보다 과도한 이 같은 규제 탓에 중소기업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비용 부담’이다. 신규 화학물질을 개발하면 화평법에 따라 해당 물질의 유해성과 위해성을 평가하고 등록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한 도료용 화학물질 제조업체 대표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제도가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일부일 뿐이라 자비로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며 “국내외에 기존 유해성·위해성 자료가 없을 경우 유해성·위해성 시험을 하거나 해외에서 사와야 되는데 비용이 정찰제가 아니라서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규 화학물질을 환경부에 등록하기 위해선 인체 및 환경 유해성 등 최대 47개의 시험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시험 기관에 테스트를 맡기거나 외국 기업이 보유한 기존 시험 자료를 구매해야 하는데 시험자료 확보에 필요한 비용은 약 2700만원이다.
매년 1500여 종의 신규 화학물질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 중 약 20%가 100kg~1t 범위로 등록된다고 가정해도 시험 비용이 연간 83억원에 달한다.
7000여 개에 달하는 기존 화학물질 등록 비용까지 고려하면 부담은 더 커진다. 한 염료 제조업체 관계자는 “물질 1개당 자료를 준비하는데 2000만원 이상 비용이 들어가는데, 통상적으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면 다수의 신규화학물질이 투입되는게 현실”이라며 “여러 물질을 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실질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제품당 수억원에 이를 때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시간도 수개월 정도 소요되다보니 차라리 제품 개발을 포기하는 게 나을 때가 많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 과정에서 영업비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 개발 자체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국내 코스닥에 상장된 한 중견기업도 최근 신규 화학물질 사업성 검토 과정에서 보안 문제가 걸림돌이 돼 사업을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을 1t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위험성이 낮은 원료에는 제도를 적용하지 않거나 정부가 유해성 시험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EU에서는 기업에서 제출한 분류표시 정보에 따라 유해성 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추가적으로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며 “EU와 같은 신고제도 도입시 유해성 확인을 위한 정보를 확보하면서도 기업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인력을 확보하도록 의무화한 규정도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소규모 기업을 기피하는 상황이어서 회사 대표가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지만 대표들의 연령대가 60~70대인 경우가 많아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다”며 “현행 30인 미만에서 50인 미만으로 기술인력 인정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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