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책무 재원 수신료 급감 현실화에 '딜레마' 빠진 KBS
11일 국무회의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의결 뒤 윤석열 대통령 곧바로 재가
다큐 등 제작중단·지역국 투자 축소·비정규직 피해 등 가능성
홈쇼핑 연계편성 않던 KBS·EBS, 상업성 강화될 우려도
[미디어오늘 박서연 기자]
“공영성을 담보하는 프로그램이 최대한 다치지 않고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걱정된다. 특히 라디오 채널인 국내 유일의 클래식 전문 채널 1FM, 장애인과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사랑의 소리', 북한주민과 북방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한민족방송', 세계의 청취자에게 코리아 브랜드를 알리는 '국제방송' 등이 있다. 과연 이 채널들을 운영할 수 있을까.” (A KBS 관계자)
지난 11일 전기요금과 TV수신료(KBS·EBS) 징수를 분리하기 위한 방송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한국전력은 앞으로 TV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고지하지 않는다.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민께서는 수신료 납부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고, 수신료에 대한 관심과 권리 의식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해외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전자결재로 곧바로 재가했다. KBS는 즉시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밝혔다. KBS는 “프로그램과 공적 책무수행에 써야 할 수신료가 징수 비용으로 더 많이 쓰여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했다.
KBS가 '딜레마'에 빠졌다. 분리징수로 인해 수신료 미납자가 늘고, 연체료 징수를 위한 추가적인 비용까지 생겨날 전망이다. 지난해 7000억 원 정도 걷힌 TV수신료가 최대 절반까지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상황에서 공적 책무 차원의 프로그램이나 사업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를 단행하면 공영성이 위축되고 비판받을 수 있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김의철 KBS 사장은 10일 입장문을 내고 △신규사업 모두 중단 △기존 사업과 서비스들 원점 재검토 △비상경영TF 구성 등을 하겠다고 밝혔다. KBS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비용절감 방안은 마련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다만 KBS 고위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장애인방송, 대북방송, 국제방송 등 공익적 목적의 라디오 채널 축소 △시사·다큐멘터리 제작 축소 △지역국 투자 축소 △교향악단 지원 축소 △대하사극 편성 축소 등 가능성이 있다. B 관계자는 “장애인방송, 대북방송, 국제방송 등을 어쩔 수 없이 손댈 수밖에 없을 거다. 국민 입장에서 수신료 분리징수한다고 이런 것(공적책무 역할)부터 안하면 KBS에 대한 여론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게 딜레마”라고 토로했다.
A 관계자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태”라며 “교향악단에도 110억 원 정도 지원하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 유일 클래식 채널 운영이 가능한가 의문이 든다. 9개 지역총국을 유지하는 돈으로 50억 원씩만 잡아도 450억 원이고, 을지국에 들어가는 비용을 15억 원씩만 잡아도 100억 원이 넘어간다. 3% 이상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을 틀어야 하는데, 한해 30억 원 정도 든다. 이런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제작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A 관계자는 “기후 위기 대응 대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4편 찍는데 25억 원 정도 들었다. 10월 독도의 날을 맞아 1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다큐를 제작 중이고 '인간 프로젝트'라는 4편에 15억 원짜리 다큐도 제작 중”이라며 “KBS가 그동안 차마고도, 누들로드 등 다큐를 통해 평가받기도 했는데, 앞으로 어려워질 거다. ENG카메라를 가지고 나가서 제작하는 프로그램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작비와 인건비 감축 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본사 정규직이 아닌 구성원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도 있다. 특히 방송 작가, 독립PD, 리포터, 캐스터 등 비정규직 인력들의 처우가 열악해지거나 고용이 중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C 관계자는 “모든 부문에 다 영향이 갈 것”이라며 “그런데 전제 조건은 (TV수신료가) 어느 정도 걷히는지를 정확하게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KBS가 수신료 수입이 급감하면 상업광고에 더 주목하게 되고 방송의 상업성이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방통위가 2021년 3월 한 달간 건강정보프로그램-홈쇼핑 연계편성 현황을 점검한 결과 지상파 2개 채널과 종편 4개 채널의 45개 프로그램에서 520회의 연계편성을 확인했다. 연계편성은 건강 프로그램에서 특정 성분이나 제품을 홍보하면 동시간대 홈쇼핑에서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편성 행위로 규제 사각지대로 꼽힌다. 조사 결과 KBS와 EBS만 연계편성이 1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MBC(80회), SBS(59회)와 대조적이다.
A 관계자는 “홈쇼핑 연계 편성하지 않는 이유는 '수신료를 받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조직문화가 있다”며 “매일 평일 아침 오전 7시 KBS 2TV 시사교양 프로그램 '해 볼만한 아침 M&W'는 기존에 하던 협찬이 붙던 프로그램을 과감히 포기하고 공영성을 강화하자는 측면에서 경제 세계 뉴스로 바꿨다”고 했다.
KBS가 이외에도 기업 협찬이 용이한 프로그램을 늘리거나, 방송 내 간접광고를 늘릴 수 있다. 전략적으로 1TV에 방영하는 프로그램들을 2TV로 재배치할 수도 있다. 방송광고 시장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면 오히려 종합편성채널 등 경쟁 채널의 방송광고가 일정 부분 줄어들어 방송 광고시장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이는 EBS에도 해당되는 문제다. EBS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계획이 나온 건 없다”면서 “지금도 수신료 배분 몫이 적은데 앞으로 연간 100억~150억 사이의 수신료가 감소할 것으로 추정돼 타격이 작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달 EBS는 입장문을 내고 “EBS는 더욱 상업적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고 우려했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는 “KBS가 설득할 건 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 그 방안을 정부에 제시하고 국민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KBS가 수신료를 왜 받아야 하는 건지, 수신료를 안 내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방송에 공익광고로 내보내고 있다. KBS는 이뿐 아니라 어떻게 환골탈태할지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심영섭 교수는 “정부는 KBS에 시간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영방송 시스템을 포기하고, 상업화하도록 방치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며 “공영방송의 외피를 두른 상업화된 방송만 남게 되면 상업적 프로그램을 만들 수밖에 없다. 뉴스, 시사 프로그램마저도 상업적 이익, 광고주 이익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영방송이 필요하고, 권력뿐 아니라 광고주와 이익단체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이 필요한 거다. 재원을 고갈시켜 공영방송이 붕괴되도록 만드는 걸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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