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는 색깔이 없다
[한겨레 프리즘]
[전국 프리즘] 송인걸 | 전국부 선임기자
영화 <범죄도시2>에서 강해상(손석구)은 가슴 한복판에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 문신을 새기고 마체테(정글도)를 휘두르며 마약, 살인, 강도살인을 쉴 새 없이 저지른다. 이상용 감독은 시사회에서 “강해상의 문신은 ‘나를 괴롭힌 자를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풀어놓은 경전인 <예기>는 불구대천지수를 ‘아버지·형제·친구를 해친 자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풀었다.
2021년 10월28일 강원 철원군 백마고지 참호에서 전투 자세로 발굴된 조응성 하사, 올 3월28일 충남 아산 성재산 교통호에서 손이 묶이고 앉은 자세로 숨이 끊긴 에이(A)4 유골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조 하사 철모와 두개골을 관통한 총상이 생생했다. 1928년생으로 1952년 5월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입대한 그는 9사단에 배속돼 고지 방어 전투를 수행하다 그해 9월 실종됐다. 지난해 신원이 확인된 그는 70년 만에 딸과 재회했다.
성재산 에이4 유골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처음으로 발굴한 부역 혐의 희생자 40구 가운데 한구다. 1950년 10월~1951년 1월께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 이 유골들은 손목이 묶인 채 봉우리 쪽을 향해 한줄로 앉아 총살당한 모습이었는데, 에이4만 산 아래쪽을 향해 교통호 벽에 기대고 있어 다른 이들의 최후를 지킨 듯 보였다.
한국전쟁은 불구대천지수를 양산했다. 죽고 죽인 비극은 전국에 걸쳐 좌익·우익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다. 충남 태안에서는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좌익으로 몰린 1049명과 우익 136명 등 모두 1185명이 죽었다.
지난해 2월 만난 정낙관(당시 87·태안 소원면 만리포)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보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괴로웠다”며 울었다. 그는 “청년단과 지서 경찰이 아버지가 숨은 곳을 대라며 때리고 삼촌들을 대신 끌고 가 죽여 무서웠다”며 “어느 날 아버지가 오셨길래 ‘나가라. 다른 데 가서 숨으라’고 했다. 아버지가 집을 나섰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고 전했다.
태안은 가해자 후손과 희생자 후손이 여전히 한동네에 산다. 알은체도 않고 말도 섞지 않는다. 적대 세력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는 한 주민은 “좌익들 위령제 예산을 국가가 대주는 게 말이 되냐”고 억울해했다. 다른 주민은 “선생님이 제자인 아버지와 삼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는데 가만두느냐”고 대꾸한다. 박민교 태안유족회 이사는 “진실을 밝히자고 하면 ‘가슴에 묻고 죽으면 끝날 일을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고 하지만 불구대천지수의 한은 깊다”고 전했다.
한국전쟁 뒤에도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민주인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처형했고, 민주화운동가와 노동운동가를 탄압했다. 광주에서는 군인이 시민을 살해했다. 왜곡·은폐된 진실을 밝혀 국민 화해와 통합을 이루자는 과거사정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은 대통령 직선제 네번째 정권인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인 2005년에야 제정됐다.
가해자는 참회하고 피해자·유족은 용서하는 화해가 이뤄지고 있을까. 좌익 희생자 유족과 우익 희생자 유족 모두 “지금 사회 갈등이 옛날보다 더 심하다. 지금 전쟁 나면 더 심각한 학살이 일어날 것 같다”고 우려한다. 레드 콤플렉스를 앞세운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세대별·성별·지역별 대립을 부추기는 세력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안>에 출연해 태안 학살을 알린 강희권 태안참여자치시민연대 의장은 “뼈는 색깔이 없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여야와 정부가 시급하게 할 일은 법의 비호 아래 행해진 국가폭력을 풀어내어 국민 화해를 이끄는 정책을 펴는 것”이라고 말했다.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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