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우리는 ‘숨은 정책 행위자’ 자본을 얼마나 알고 있나

이창곤 2023. 7. 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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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의 정담]23 _사용자단체1

하지만 간과하거나 충분히 살피지 않은 또 다른 행위자가 있다. 바로 사용자단체다. “사용자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이해를 관철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조직”인 사용자단체는 복지국가 교과서에조차 잘 거론되지 않지만, 더 나은 사회와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다. 스웨덴 살트셰바덴 협약도 당시 사용자단체(스웨덴 경총, SAF)의 선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지난 3일 민주노총이 2주간 총파업에 들어가자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 네번째)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재계 6개 단체 고위관계자들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호준 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우태희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정만기 무역협회 상근부회장, 이 장관,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 배상근 전경련 상무, 이명로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본부장. 연합뉴스

“국가는 소멸해도 시장은 없어지지 않는다”, “기업 없이는 국가안보도 없다.”, “우리의 산업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기업정책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부처 업무보고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시장’이다.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 분배정책을 담당하는 사회부처 업무보고에서도 시장을 강조할 정도다. 그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단어는 ‘산업’과 ‘기업’이었다.

윤 대통령은 왜 이렇게 시장, 그리고 산업과 기업을 강조할까? 이 물음에 스스로 답한 바 있다. “정부와 기업은 한몸이고 원팀”(1월16일 아랍에미리트 순방)이며 “우리도 기업의 한 전략부서라는 그런 마음”(1월11일 외교·국방부 업무보고)에서라고.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최상위 결정자다. 그의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발언이 말치레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법인세와 상속세 감세, 노동시간 유연화,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규제완화 등 이른바 ‘시장 친화적인’ 정책이 윤 정부에 의해 복창되고 추진되고 있다. 이런 기조는 사회서비스 고도화 등 복지정책 분야까지 이어졌다.

윤 대통령의 발언과 정부 정책기조에 가장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곳은 재계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이른바 ‘경제 6단체’는 공동성명을 내어 대통령 발언에 화답하고 정부 정책에 동조했다. 이들은 최근 공동성명에서 민주노총의 ‘7월 총파업’을 “불법 정치파업”으로 규정하고, 파업 중단을 촉구했다. 앞서 5월 말엔 노동조합법 개정안(노란봉투법) 국회 본회의 상정 중단을 요구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화물연대 파업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성명도 냈다.

이런 움직임은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외교사안에서도 나왔다. 지난 3월 초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회담을 “환영”하는 공동성명을 낸 게 대표적이다. 여기에 더해 윤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배상안을 지지하는 광고를 조·중·동 등 주요 중앙일간지 1면에 싣기도 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이 광고를 싣지 않았다.

윤 정부와 재계단체의 이런 ‘정책 동조’는 여러 질문을 낳는다. 윤 대통령의 시장친화적인 태도는 온전히 그의 뜻인가? 재계는 왜 잦은 공동성명을 내면서 정부와 한배를 타고자 하는가?

재계단체가 시장과 기업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발언과 정부 정책에 호응하는 것이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을 나오는 이유는 윤 정부 들어 나타나는 권력과 재계의 동조화가 신정경유착 수준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재계단체와 윤 정부의 정책 동조는 노·사·정 3축 가운데 한축인 노동조합 때리기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노사정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할 주요 정책을 노조를 배제한 채 ‘친시장 경제’ 일방향으로 과속 전개하고 있다는 얘기다. 보수정부와 재계 관계를 “으레 그런 것”이란 관성으로 볼 일이 아닌 이유다.

일례로 윤 정부는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민감한 사안들을 규제완화 목록에 포함해 검토·추진하고 있는데, 이들 과제는 지난해 3월 경총이 작성한 ‘신정부에 바라는 노동개혁 방안’과 죄다 겹친다. 좋은 나라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일방적 지배가 아닌, 노동과 자본이 공존, 상생하는 나라, 즉 함께 잘 사는 나라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관계법이 사용자에게는 인사와 경영권을, 노동자에게는 노동삼권을 보장해 노사가 힘의 균형을 통해 안정과 화합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현실에서 보이는 노사관계는 대립과 갈등인 경우가 많고, 결국엔 역학관계에 의해 결론 나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일방적 지배나 대립, 갈등만으로 공동체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함께 잘사는 공동체’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복지국가 스웨덴도 한때 자본의 일방적 지배와 그에서 비롯한 첨예한 노사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노동과 자본은 1938년 살트셰바덴에서 공존과 상생의 길로 향하는 계급타협을 이뤄냈다. 노동은 자본의 소유권과 경영특권을 인정하고, 자본은 노동의 기본권을 인정했다. 노사관계 수준에서 이뤄진 “계급타협은 점차 행정영역으로 확대됐고, 노사정 삼자가 거시경제 정책을 공동으로 결정하는 정책타협으로 진전”(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됐다. 계급타협이 노동과 자본 간의 ‘단체교섭’에서 노동, 자본, 국가 삼자 사이 ‘정책교섭’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로써 스웨덴은 오늘날 “공동결정제 등 경제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자본의 일방적 지배가 아니라 노동과 자본이 권력과 기회를 공유하는 계급관계를 실현”(조돈문 가톨릭대 명예교수)하고 있다.

이런 노사 상생의 계급타협과 복지국가를 가능케 한 동인을 두고 전문가들은 흔히 노동조합과 정당이란 권력자원을 강조해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간과하거나 충분히 살피지 않은 또 다른 행위자가 있다. 바로 사용자단체다. “사용자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이해를 관철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조직”(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인 사용자단체는 복지국가 교과서에조차 잘 거론되지 않지만, 더 나은 사회와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스웨덴 살트셰바덴 협약도 당시 사용자단체(스웨덴 경총, SAF)의 선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단순히 재계의 확성기 구실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용자단체에 당장 스웨덴 경총과 같은 역할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직시해야 할 것은 사용자단체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행위자란 사실이다. 시민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에, 사용자단체의 태도와 인식, 정책선호와 움직임 등은 열심히 톺아보아야 할 핵심 대상이다.

대한민국 사용자단체는 누가 이끄는가? 어떤 모습을 띠는가? 이들은 노사관계의 당사자로서, 또한 대한민국 정책과정에서 과연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서 오늘날 이르기까지 그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시민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제반 이슈와 정책에 이들은 어떤 인식을 보이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공식, 비공식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을 “대한민국 사용자단체는 어떻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란 한 문장으로 응축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어디에서도 속 시원하게 얻을 수 없다. 사용자단체는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가장 드러나지 않은 ‘숨은 블랙박스’이기 때문이다. 학계 연구 또한 연구자를 손꼽을 정도로 태부족이다.

지난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4대 재벌 총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상생협력대책회의에서 대기업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나온 말이라지만, 그 발언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 경제권력의 지위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회자했다.

한 나라의 정책이 기업과 기업의 이윤추구 수단이 된 국가를 두고 학자들은 ‘기업국가’라고 부른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저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국가와 정부가 기업에 동화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나라 안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모르는 사이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확산된다”라고 경고했다. 국가는 기업과 다르다. 해서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될지언정 “기업국가”가 돼서는 안된다. 그래서 김 교수의 통찰이 새삼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이 연재칼럼 집필에 매진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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