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행 예측 실패한 '뒷북 방역'…3400만명분 폐기 불가피
코로나19 추가 접종(부스터샷)에 활용되는 BA.1과 BA.4/5 기반 코로나19 백신이 현재 우세종인 XBB 변이에는 예방 효과가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방역 당국이 다가오는 가을~겨울 유행에 대비해 '새 백신'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백신 부작용 우려에 따른 접종률 하락과 유효기간 만료가 겹치면서 현재 보유 중인 3400만회분의 백신 상당수는 폐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유행 예측에 실패한 '뒷북 방역'에 애꿎은 세금만 낭비됐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1일 질병관리청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질병청 예방접종전문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위원 전원 동의로 XBB.1.5 변이 기반의 새 백신을 다가오는 동절기 접종용으로 결정했다. 질병청 관계자는 "오는 10월 접종 시작을 목표로 백신 도입 시기와 공급량 등을 제조사와 협의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계획은 8월 말~9월 초에 발표할 것"이라며 "동절기 접종을 위해 기존 계약 물량 일부를 새 백신으로 전환 도입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오미크론 하위 변위인 'XBB' 계열 변이다. 지난 1일 기준 XBB.1.9.1(24.5%), XBB.1.9.2( 21.6%), XBB.1.16(20.8%), XBB.2.3(14.1%), XBB.1.5(10.3%), 그 외 XBB 계열(5.2%) 등 전체의 96.5%가 XBB 변이에 해당한다. 코로나 XBB 변이는 인도에서 시작돼 지난해 10월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됐다. 올해 초만 해도 오미크론 하위 변위 중 BA·1과 BA. 5, BA. 2.75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몇 개월 만에 '바이러스 지도'가 확 바뀌었다. XBB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도 우세종으로 자리매김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할수록 전파력은 높아지고 면역 회피 능력이 향상하는 경향을 띤다. XBB 변이 역시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실제 XBB 변이는 기존의 BA.1과 BA.4/5 기반의 개량백신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연구부가 지난 5일 '코로나19 빅데이터 활용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화이자·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추가 접종(추가 접종)은 오미크론 변이가 거듭될수록 감염병 예방 효과가 크게 줄었다. 특히, 50세 이상에서 4차 이상의 백신 접종은 초기부터 코로나19 발생을 예방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 시간이 흘러 그나마 남은 백신의 예방 효과까지 줄면서 코로나19 재유행 조짐마저 감지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에 따르면 지난주(4~10일) 주간 일평균 확진자 수는 2만2819명으로 전주 대비(6월 25일~7월 1일, 1만7443명) 30%나 늘었다. 지난달 1일 코로나19 위기 경보 단계가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된 후 감소세를 유지하다 7월쯤 증가 추세로 전환됐고 갈수록 증가 폭이 커지고 있다. 감염재생산지수(확진자 한 명이 몇 명을 감염시키는지 나타내는 수치)도 1을 넘었다.
화이자와 모더나는 이미 XBB 기반 백신 개발을 완료한 상태로 미국 FDA와 유럽 의약품청(EMA) 등 주요 국가의 규제기관에 품목 허가 신청서를 잇달아 제출하고 있다. 모더나코리아 관계자는 "XBB.1.5 타깃 '새 백신'에 대한 임상 시험 중간 분석 결과 해당 백신을 5차 추가 접종할 때 면역 반응은 접종 이후 15일 차에 최근 유행하는 XBB.1.16와 XBB.2.3.2를 포함한 하위 변이에서까지 강력한 중화 반응을 유도했다"며 "현재 한국의 규제당국과도 도입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사용되는 새 백신은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전량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이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까지 1176만2000회분의 백신이 폐기됐는데 올해는 훨씬 더 폐기 물량이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까지 폐기된 백신 중 개량백신은 29만4000회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이전에 구입한 단가 백신(화이자 503만1000회분, 모더나 450만8000회분, 노바백스 151만5000회분)이었다. 새 백신이 개발되면 현재의 개량백신도 불분명한 효과 등을 이유로 앞서 단가백신과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신도 유효기한이 있는데, 오는 9월 말까지 기한이 만료되는 물량도 전체의 3분의 1(1360만회분)에 달한다. 질병청에 따르면 이미 구매한 백신을 새 백신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구매 계약상 비밀 유지 의무를 이유로 정확한 백신 단가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1회분당 2만5000원 정도로 알려진 점을 감안하면 지난해까지 폐기된 백신에 투입된 돈은 30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한 백신은 이보다 3배 정도 많다. 추정 금액은 9000억원에 육박한다. 정부가 적절한 수요예측 없이 백신 물량을 사들인 뒤 폐기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일각에서는 '혈세 낭비'라는 지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질병청은 "코로나19 백신의 활용도 제고와 폐기 최소화를 위해 외교부와 협조를 통한 해외공여, 기도입 백신의 유효기간 연장 조치, 도입 예정물량의 시기 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 중에 있다"고 전했다.
힌편, 국내 백신 제조사가 올가을 유행에 대비해 새 백신을 내놓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산 1호 코로나19 백신(스카이코비원)을 개발한 SK바이오사이언스는 머니투데이에 "현재 스카이코비원의 XBB 변이 예방 효과를 확인하고 있지만, 해당 변이를 타깃으로 한 별도의 새 백신 개발은 나서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엔데믹 상황에서 향후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변이 바이러스에 광범위하게 대응하기 위해 코로나19·사스(SARS) 바이러스의 상위 계통인 '사베코 바이러스'(Sarbeco Virus)를 타깃으로 한 '범용 백신' 개발에 힘을 싣는다는 전략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 관계자는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으로부터 초기 연구개발비 5000만 달러(약 653억원)를 지원받아 현재 초기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이미 개발에 성공한 스카이코비원의 플랫폼을 활용하는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엄 교수는 "앞으로 어떤 코로나19 변이가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빠른 백신 개발을 위해서는 '백신 플랫폼'의 고도화가 필수"라며 "백신 수요 예측, 막대한 인력·장비 투자 등 개발 과정을 기업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되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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