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천지수가 읽은 그림책]
intro
그림책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를 아늑한 기분에 빠지곤 한다.
가장 소중한 존재가 돼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랄까. 온 우주가 나를 향해 미소 지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휙~ 하고 나를 그 시간으로 보내주는, 그림책은 폭신하고 따뜻한 타임머신이다.
화가 천지수가 읽은 두 번째 그림책은 ‘옥춘당’(고정순 글·그림 / 길벗어린이)이다.
“말을 잃고 아무 때나 잠드는 할머니를, 의사는 조용한 치매 환자라고 했다. 할머니는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곳의 시간에는 관심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림책 ‘옥춘당’은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고정순 작가는 자신에게 기억하고 싶은 유년을 남겨 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잊지 못한다. 이 그림책은 두 분께 바치는 작가의 헌사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전쟁고아였다. 기차역이 있는 작은 도시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한 두 분은 서로에게 늘 다정했고, 둘도 없는 친구였다. 마치 ‘옥춘당(玉春糖)’ 같았달까? 옥춘(玉春)은 쌀가루와 엿을 섞어 만든 바탕에 색소로 알록달록한 색동무늬를 물들여 만드는 동글납작한 사탕이다. 옛날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올랐던 추억의 과자다.
옥춘당을 풍선처럼 타고 날아오르는, 한없이 행복한 표정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정말 인상적이다. 할아버지는 제삿날마다 할머니와 아이들의 입에 옥춘당을 넣어주셨단다. 그림이 품고 있는 따뜻함에 녹아들어 간다고 표현해야 할까? 내 혀끝에서도 다디단 옥춘당의 맛이 느껴졌다. 사랑에 맛이 있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이 책의 첫 장엔 ‘사랑을 믿는 당신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혀끝을 맴돌고 있는 이 미각의 정체는 ‘사랑을 믿게 만드는 맛’이겠구나 싶었다.
다시 그림책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던 할아버지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은 모습으로 할머니를 살뜰히 챙기며 변함없는 일상을 함께 보낸다. 그러고는 어느 화창한 초여름,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고는 세상을 떠난다. 할아버지 없는 세상에 남겨진 할머니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 버린다. 할머니는 말을 잃는다. 그리고 기억도 잃는다. 아무 때나 잠이 들었고, 갑자기 아이처럼 운다. 할머니에게는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만이 삶의 전부가 된다. 할머니의 병세는 나날이 깊어만 간다.
작가는 할머니의 멈춰진 시간들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표현한다. 나는 그 그림들을 보면서 인생의 오랜 의혹들을 풀었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늘 ‘사랑이 정말 있을까?’ 의심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을 보는 동안 그 의심이 다 녹아버린 듯했다. 마치 입안의 사탕이 녹듯이 말이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고 눈물이 났다. 조금 슬펐고 많이 아름다웠다.
책 속의 할머니는 이제 요양원에서 종일 동그라미를 그리며 보낸다. 그 동그라미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원을 완성하려면 그리기 시작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못내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억의 첫 지점 말이다.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이 평범하고도 깊은 진리를, 가슴 저릿한 감동과 함께 전하는 멋진 그림책이다.
천지수(화가·그림책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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