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한, 서평연대 아홉 번째[출판 숏평]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의자 글·림 / 마음의숲)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낯선 곳에 떨어지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꽃길’이라는 표현처럼 평탄하고 안정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 따로 없다. 서른 중반, 기꺼이 자신을 울렁이는 파도 위로 내동댕이친 화가는 두려움에 떠는 우리의 등을 떠민다. 일단 뛰어들어 즐기라고, 그곳에 인생의 정수가 숨어 있다고. 모랫바닥이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했던 우울한 순간부터 하늘 높이 치달을 듯 행복한 순간까지, 출렁이는 감정의 파고가 글과 그림의 형태로 손 안에서 생생하게 너울진다. 낯선 뉴욕에 떨어진 그녀가 대책 없이 겪은 모든 파도를 읽고 있자면 마치 함께 파도 위에 올라선 듯 마음이 울렁인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 나도 낯선 곳에서 대책 없이 살고 싶다’고….(황예린 / 출판칼럼니스트,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성매매 경험 당사자 무한발설(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 지음 / 봄알람)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멸시는 대개 이런 식이다. ‘어차피 돈 벌려고 한 짓인데, 왜 이제 와서 피해자 흉내냐.’ 그들의 경험은 반드시 평가, 치부당해 왔으며 선택적으로 차용됐다. 세상은 성매매가 오로지 ‘몸을 파는 사람들’로 하여금 순환되고 있다 믿으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폭력에서 당위성을 찾는다. 딸, 아가씨, XX년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람 취급은 받지 못하는 여성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는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과거를 안고 있기에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여성들을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곧 실천’이기 때문에.(김정빈 /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날씨부터 동그라미(최영희 지음 / 김선배 그림 / 낮은산)
성장의 길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깨지기 쉬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날씨부터 동그라미’는 일기장의 시선에서 주인공 동미의 성장 과정을 그려낸 독특한 구도의 소설이다. 동미는 일기에 우리가 어린 시절 일기에 그러했듯이 픽션을 기록한다. 작품의 도입부에 동미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사건으로서 표현해 일기에 담아낸 것만 봐도, 그가 일기에 실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보편우주’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에 기록하는 날씨와 자신만의 세계 ‘개별 우주’ 안에서만 벌어진 가상의 사건은 그날의 심경을 은유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한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 최영희는 “누군가의 ‘개별 우주’는 온전한 해독이 불가능하며, 해독되지 않는 채로 두는 게 좋다”며 “그래야 동미들이 제 세상에서만 내리는 비에 젖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화자인 일기는 동미의 세계에 관해 질문을 던지거나 깊숙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의문도 갖지 않는다. 그저 한 발짝 물러난 상태로 아주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일기의 모습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김현구 /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광주: 용도락/ 광주식도락투어 : 지역의 사생활 99(작은비버 지음 / 삐약삐약북스)
‘퇴마록’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한국의 판타지 장르 소설·만화들이 저마다의 강도로 서구 문화의 ‘로컬라이즈’를 이루어 냈다면 ‘지역의 사생활 99’ 시리즈는 ‘로컬’ 판타지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한국형 판타지가 아닌 한국 판타지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등장은 부모 뒤에 자식이 나듯 자연스러운, 우리나라 판타지 장르 발전의 한 수순이었다.
외계인들은 정체를 들키더라도 ‘우주선은 무슨, 갓이구만!’ 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하여 선택된 지구 관광지 ‘전주’로 놀러 오고, 타인의 꿈속을 방문할 수 있는 ‘드림 워커’와 성심당 앞을 걷거나 할머니의 절친인 용이 지금도 존재하는 광주 맛집들을 떠올리고 ‘광주 식도락’을 떠나기도 한다. 판타지 요소가 없는 시리즈도 ‘수도권의 상상력이 닿지 않은’ 그 지역의 서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쥐고 읽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지는 이야기들, 실제로 겪은 추억처럼 어딘가에 콕 박혀 언젠가 물씬 밀려올 그리움이 될 그런 이야기들이다.(박소진 / 문화평론가, 웹소설작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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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엄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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