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욕망 먹고 자라는 악귀… 현실 같은 공포에 빠져들다
악령 씐 여자와 민속학 교수가
의문의 죽음 파헤치는 공포물
시청률 11%로 치솟으며 인기
옛 문헌서 나온 ‘태자귀’ 등에
가정폭력 등 사회적 문제 녹여
‘귀신보다 인간의 무서움’ 각인
다시 납량(納량) 특집이 필요한 계절이다. 대중을 소름 돋게 만드는 장르는 여럿이다.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을 앞세운 스릴러(thriller)나 좀비나 괴물이 등장하는 크리처(creature)물 혹은 호러(horror)물도 있다. 최근에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초자연현상이나 악령을 다룬 오컬트물이 여름철 더위를 쫓는 새로운 피난처로 주목받는 모양새다.
◇역사적 기록에 상상력 덧댄 ‘악귀’
좀비를 다룬 ‘킹덤’ 시리즈로 유명한 김은희 작가의 신작인 SBS ‘악귀’는 악령이 씐 여자 산영(김태리 분)과 그 악령을 볼 수 있는 민속학자 해상(오정세 분)이 의문의 죽음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린 오컬트물이다. 마이너한 소재임에도 높은 완성도에 대한 호평과 더불어 최고 시청률은 1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했다.
‘악귀’는 기록으로 남겨진 풍습에 상상력을 덧대 이목을 끈다. 병마와 액운을 막기 위해 어린아이를 일부러 죽여 태자귀로 만들었다는 ‘악귀’ 속 설정은 실제 역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를 며칠 굶긴 뒤 실신 지경에 이르면 아이 앞에 먹을 것을 갖다 놓고 손을 내미는 순간 죽인 후 그 영혼을 조종한다’는 작품 속 설명은 조선시대 기록서를 비롯해 1970년대 실제 아이를 유괴해서 태자귀를 만들려고 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악귀’가 현대 사회의 병폐를 악령과 연결시키는 솜씨도 남다르다. 학교·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혼령으로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고, 악령에게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줄 알았던 청춘들이 알고 보니 악덕 사채업자들에게 협박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인간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고 새삼 웅변한다. 평소 흔히 쓰는 ‘아귀다툼’이라는 표현이 탐욕이 많은 아귀(餓鬼)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SNS 홍수 속 ‘드러내기’와 ‘질투’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재물을 탐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아귀에게 지배당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흐름은 꽤 설득력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악귀는 인간의 불안의식 등이 만들어내는 허상인 동시에 그만큼 현대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방증”이라면서 “결국 ‘악귀’가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은 ‘더 글로리’나 ‘기생충’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짚으며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구조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악귀’는 이야기의 뿌리를 민속학에서 찾는다. 앞서 ‘킹덤’을 집필하며 조선순조실록 순조대왕행정에 ‘가을에 괴질이 유행하여 서쪽에서부터 들어왔는데 열흘 사이에 도하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수효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는 구절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는 김 작가는 ‘악귀’에서는 여자 어린이의 머리 장식으로 쓰인 배씨댕기나, 죽은 아이를 매달아 놓았다는 덕달이 나무 등을 이야기의 재료로 꺼내 쓴다. 윤 교수는 “민속학을 내세워 한국적인 이야기를 담은 K-콘텐츠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실과 판타지의 조화에 ‘오싹’
오컬트물은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돼 대중에게 소개됐다.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가 계단을 거꾸로 내려오는 장면이 담긴 1975년 영화 ‘엑소시스트’가 효시 격이다. 이듬해에는 6월 6일 오전 6시에 태어난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오멘’이 개봉돼 대중에게 ‘666=악마의 숫자’라 각인시켰다. 2010년대에는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시리즈와 여기에 파생된 ‘애나벨’과 ‘더 넌’이 대표적 오컬트물로 손꼽힌다.
국내 오컬트 영화는 1998년 개봉된 ‘퇴마록’이 출발선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퇴마 의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검은 사제들’을 비롯해 ‘사바하’ ‘사자’ 등이 개봉됐고, 687만 관객을 모은 ‘곡성’은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 시장에서는 처녀귀신, 구미호, 몽달귀신 등을 대거 등장시킨 ‘전설의 고향’이 대표적 오컬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배우 심은하 주연 ‘M’과 이서진이 출연한 ‘혼’을 거쳐 최근 ‘방법’ ‘손 the guest’ 등이 오컬트 드라마의 명맥을 이었다. ‘악귀’를 연출한 이정림 감독은 “오컬트 장르가 갖는 익숙하지만 낯설고 기묘한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 엑소시즘, 엑소시스트가 나오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서양 오컬트와 다르다”면서 “조상들이 믿고 기록해왔던 민속학, 토속신앙, 전설, 신화들이 바탕이고, 촬영을 준비하면서 민속학과 교수,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차별화를 꾀했다”고 말했다.
오컬트물은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섞으며 공포를 배가시킨다. ‘있을 법한 이야기’라 더 오싹하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한동안 강력범죄를 소재로 한 작품이 각광받았듯, 최근에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은 오컬트물이 새로운 볼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서 “막연히 귀신과 같은 판타지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사건과 결부 지으며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작품 속에서 해소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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