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창업 급증 이면엔 억압 지속…두 얼굴의 사우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앱을 통한 숙소 렌털 서비스 ‘게던’(Gathern)을 경영하는 라티파 알타미미 설립자는 요즘 이 나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성 테크 기업인이다. 2017년 창업한 뒤 현재 사우디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5만개 넘는 숙소를 제공하는 업계 최대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라티파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2022년 선정한 중동 여성 테크 기업인 20명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리야드에서 일하는 여성을 위한 공유 오피스 ‘쉬워크스’를 창업한 여성 기업인 마하 시라도 최근 들어 크게 변한 사우디의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같은 건물에 어린이집을 두고 있는 이 공유 오피스는 여성들이 아이를 맡긴 뒤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그는 이 공간을 여성들의 창업을 돕는 허브로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그는 몇해 전 유튜브 ‘사우디 여성 스토리’ 채널에 출연해 사우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상당하다고 강조했다. ‘왜 검정 천을 두르고 다녀요’,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게 낫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면서 “책에서 본 것만으로 사우디를 판단”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우디 여성들이 내가 과거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길 원한다”고 힘줘 말했다.
■ 일하기 시작한 사우디 여성들
라티파와 마하 시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세계에서 여성의 권리를 가장 많이 제약하는 나라로 꼽혀온 사우디가 변했다. 여성들이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5년 1월 부친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의 즉위와 함께 사우디의 실권을 쥐게 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경제 다각화를 꾀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게 변화의 기폭제가 됐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점은 올해 38살인 무함마드 왕세자가 7년 전인 2016년 4월 내놓은 ‘사우디 비전 2030’ 보고서였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 보고서에서 “여성들은 사우디의 또 다른 위대한 자산”이라며 “우리 경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여성의 경제 참여율을 30% 이상으로 높이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여성의 운전과 해외여행을 허용했고, 각종 민법과 노동법을 개정해나갔다. 7년이 지난 지금 세계은행 등 주요 기관에서는 사우디 여성들의 경제 참여율이 놀랄 만큼 성장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5월엔 사우디의 여성 과학자 라이야나 바르나위가 민간 우주비행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사우디가 여성 우주인을 배출한 나라가 된 것이다.
지난달 3일 리야드에선 ‘기술 분야의 여성들’(Women in Tech)이란 이름의 대회가 열렸다. 핀테크(금융 정보기술)·생명공학·프롭테크(부동산 정보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여성 스타트업을 8곳 선정해 집중 육성하는 선발 무대였다. 1위로 뽑힌 이는 주식 거래 앱을 개발한 기업 ‘사흠’의 대표 자와히르 야흐야였다. 사우드 알 사브한 사우디 중소기업청(Monsha'at) 부청장은 이 자리에서 “우리는 여성이 주도하는 중소기업의 수를 46만7천개 이상으로 늘렸다. 이들이 사우디 테크 분야에 놀라운 발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수상 기업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받게 된다.
2016년 설립된 사우디 중소기업청은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여성 기업인의 비즈니스 참여가 사우디의 빠른 경제성장에 기여한다”며 “다른 나라에서는 달성하는 데 수십년이 걸리는 여성의 경제 참여율이 (사우디)왕국에서 5년 만에 달성됐다”고 자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사우디 전체 중소기업 가운데 여성이 소유한 업체의 비율은 45%(남성 55%)로, 2016년 21.5%(남성 78.5%)에 비해 갑절 이상 늘었다. 2019년 20.5%이던 여성의 경제 참여율도 2022년 33.6%로 높아졌다. 2030년까지 달성하겠다던 목표 30%를 이미 달성한 것이다. 2022년 2분기에는 여성 실업률이 사상 최저치 수준인 19.3%까지 낮아졌다.
이 같은 변화를 이끈 건 단연 무함마드 왕세자의 야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우디 비전 2030 보고서를 통해 인구의 3분의 2가 35살 미만인 이점을 활용해 2030년까지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 구조를 다각화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특히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2019년 노동법 등을 개정해 노동자 범위에 여성을 명시했고,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처음 명문화했다. 임신·출산 등 모성과 관련된 사유로 해고하는 것도 금지했다. 여성의 직장 내 정년을 55살에서 남성과 동일한 60살로 연장했다. 2018년엔 성희롱 금지를 법제화하고, 수사·보안 등 여성이 진입하지 못했던 특정 직종에 여성의 고용 제한을 풀었다. 지난해엔 정부 고위직에 여성 2명을 임명했다. 사우디 내각 사무차장에 30대 여성인 시하나 알아자즈 변호사, 관광부 차관에 하이파 빈트 무함마드 알 사우드 공주를 임명했다.
세계은행은 사우디의 변화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190개국의 성별 격차를 점수화해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은행의 ‘여성의 일과 법 보고서’에서 과거 20~30점대에 머물던 사우디의 점수는 최근 70~80점대로 올라섰다. 임금 격차, 기업가 정신, 이동성 등 8개 항목에 걸쳐 각국 법 규정에 남아 있는 성별 불평등을 수치화한 연례 보고서에서 사우디는 올해 73점을 받았다. 세계 평균(77.1점)과 비슷하고 ‘역내 라이벌’인 이란(31.3점)을 큰 차이로 따돌린 것이다. 2017년 사우디가 받은 점수는 38.8점이었다.
■ 일터로 나왔지만…여전히 발언권 제로
실제 여성들의 삶의 질은 개선됐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전한 ‘임금 격차’다. 여성들이 진입하는 일자리 대다수가 저임금인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싱크탱크 ‘워싱턴 아랍걸프국 연구소’(AGSIW) 수산 사이칼리 연구원은 지난해 12월 ‘사우디 여성의 노동력’을 주제로 보고서를 내어 “여러 진전에도 (남녀 간) 임금 격차가 49%에 달할 만큼 크고, 성별에 따른 사회적 기대치가 여전히 달라 성별 불평등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성이 100리얄을 벌 때 여성은 51리얄을 번다는 뜻이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낸 성명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는 집권 이후 국제 무대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진보적 개혁가’로 자리매김되길 원하지만, 그의 개혁은 언론의 자유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주요 법 개정에서 공개 토론이 금지된 채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단체 ‘유럽사우디인권기구’(ESOHR)는 1월 무함마드 왕세자가 집권한 뒤 매해 13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고 꼬집었다.
현재 사우디엔 사실상 ‘표현의 자유’가 없다. 이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 사우디의 피트니스 강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29살 마나헬 오타이비의 구금 사건이다. 오타이비는 자신의 트위터에 여성의 복장 규율에 이의를 제기하고, 2022년 3월 제정된 사우디의 새 개인신분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체포됐다. 그가 2022년 11월부터 사우디 당국에 구금돼온 사실이 지난 5월 말이 되어서야 공개됐다. 오타이비의 여동생 푸즈는 <아에프페>(AFP) 통신에 “사우디에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이 왕국의 표적이 되고 있다”며 “‘비전 2030’이 있는 국가와 여전히 옛날 규칙이 적용되는 국가, 사우디에는 마치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것 같은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등으로 ‘인권 후진국’ 낙인이 찍힌 사우디가 국제사회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성평등 의제를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에 본사를 둔 사우디 인권감시단체인 알쿠스트 활동가 리나 하들룰은 지난 6월 <에이피> 통신에 “무함마드가 통치하는 사우디 정권은 여성의 사회참여와 권리 향상을 말하지만, 결국엔 서방 국가들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라며 “사우디 여성들은 여전히 외출하거나 취업 등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남성 보호자의 승인이 필요한 남성 후견인 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면 투옥된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으며 억압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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