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칼럼] 윈스턴 처칠은 과학자를 가장 신뢰했다
과학 기술과 전문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위기 극복
후쿠시마 논란에서는
과학은 사라지고 현수막만 남아
운동권·법조인 쏠림 심한 국회
시대 변화에 크게 뒤처져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 출신 물리학자 프레더릭 린드먼을 과학 고문으로 등용했다. 그가 처칠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이 평화를 외칠 때 독일의 재무장을 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히틀러를 극도로 혐오했다는 점을 평가하더라도 과학자를 총리 고문으로 발탁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칠은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과 기술의 가치를 아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과학적 혁신을 믿고 지지했다. 또 린드먼 같은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과학 기술이 승부를 가를 것이라는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린드먼은 전시 내각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계 분석 부서를 운영하며 전투 현황에서 보급품 수송, 식량 배급까지 주요 데이터를 간결한 차트와 그래프로 분석·정리해, 처칠이 정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빠른 의사 결정을 하도록 도왔다. 처칠은 전쟁 통에서도 린드먼이 쉬운 언어로 정리해준 과학 기술 문서를 2000편 넘게 읽었다고 한다. 과학에 대한 믿음의 산물이 레이더 방공망 개발과 구축이었다. 영국은 브리튼섬 전체를 촘촘히 에워싼 레이더 방공망 덕분에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과시했던 독일 공군의 공습을 이겨냈고 반격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미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벤 버냉키 FRB(연방준비제도) 의장, 재무부·IMF(국제통화기금)에 근무하면서 멕시코·태국·인도네시아·한국의 금융 위기 수습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 전문가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버냉키 의장은 파격적인 제로 금리와 중앙은행의 채권 매입을 통해 금융시장에 무제한으로 돈을 공급하는 기발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앞세워 전세계 금융시스템이 녹아내리는 위기를 막아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정치인들의 태도였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벤 버냉키 의장이 참석한 청문회가 수없이 열렸다. 우리나라 같으면 의원들이 고성을 지르면서 책임 추궁하기 바빴겠지만 그들은 신중하게 버냉키 의장의 의견을 경청했다.
우리 정치권은 어떤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과학은 사라지고 현수막 전쟁과 괴담 공방전만 남았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국가의 미래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정치인들이 정작 과학적 성찰이 필요한 때에는 바닥에 떨어진 용수철처럼 거리로 뛰쳐나가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과학 문외한인 야당 의원들이 역시 과학과는 거리가 먼 정부와 대통령실 관계자들을 상대로 일본의 오염수 처리장치(ALPS)를 통해 삼중수소나 세슘 같은 방사성 물질이 걸러지니 마니 하고 고성을 지르는 장면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한 정치논객이 “우리나라가 선진 8개국(G8) 가입을 꿈꾸고 있지만 1인당 국민소득(GNI)은 여전히 세계 20위권 밖이다”고 했는데, 정치권의 문제 해결 방식과 능력을 보면 딱 그 수준이다.
이는 정치인들의 출신 배경과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기자가 현직 의원 299명을 분석해 보니 대략 학생운동이나 노동·사회단체 등 운동권 출신이 81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보좌관 출신 등 정당인(63명), 법조인(46명), 경찰 등 공무원(45명), 언론인(22명)의 순서로 나타났다. 과학 기술인이나 전문경영인으로 분류될만한 의원들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정당인·법조인·언론인 출신 중에서도 운동권 경력이 있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운동권 의원들이 족히 120~130명에 이른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반도체의 나라, 세계 7번째로 우주 로켓을 쏜 나라라는 게 무색할 정도다. 한 기업인 출신 의원은 “이념 성향이 강한 운동권과 법 논리를 따지는 법조인 의원들은 다른 의견을 경청할 줄도, 타협을 할 줄도 모른다”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민간 주도로, 기술이 변화를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피자를 굽는 데도 AI와 빅데이터 기술을 접목시킬 정도다. 하지만 국회의 인적 구성은 여전히 변화에 크게 뒤처져 있다. 내년 총선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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