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플레이션은 사실상 묵시적 담합… 미국에선 ‘담합 촉진’으로 처벌

방현철 경제부 차장·경제학 박사 2023. 7.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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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걸어다니는 공정거래법’ 신광식이 본 공정 경제
1980년대 초반부터 독과점 시장과 공정 거래 분야를 연구해 온 신광식 박사는 지난달 30일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하면서 번영하려면, 경제 권력이 시장에서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최근 ‘라면플레이션(라면+인플레이션)’이 이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국제 밀 가격이 떨어졌는데, 기업들이 밀 가격에 맞춰 적정하게 (라면 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불을 댕겼다. 라면 업체들은 1일부터 일부 라면 가격을 내렸다. 하지만 ‘주력 제품은 뺐다’ ‘올릴 땐 큰 폭, 내릴 땐 찔끔’ 등 뒷말이 무성하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경제 학계에선 지난달 IMF(국제통화기금) 연구자들이 내놓 그래프 한 장<그림 참조>이 화제다.

유럽 인플레이션 원인을 따졌더니, 최근 물가 상승의 45%가 기업 이윤 챙기기란 분석이다. ‘이윤 주도 인플레이션’이 있다는 얘기다. 이에 독과점 기업들의 탐욕이 물가 상승을 불렀는지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내 독과점 시장 연구의 권위자 중 한 명이자 로펌 김앤장에서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하고 있는 신광식 박사를 지난달 30일 만났다.

- 코로나 이후 과도한 기업 이윤 추구로 인플레이션이 생겼다고 볼 수 있나.

“코로나 때 일부 독과점 기업이 가격을 높이면서 이윤은 크게 늘었다. 그래서 이윤 주도 인플레이션, 탐욕 인플레이션(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나왔다. 대체로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수요, 공급이 작동하고 경쟁이 있는데, 기업 탐욕 때문에 체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겠나’라고 생각한다. 기업들은 원래 가격을 낮춰 점유율을 높일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윤 주도 인플레이션이 일리 있다고 보는 학자가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픽=김현국

- 왜 일리가 있다고 보게 됐나.

“원자재 값이 오르면 부가가치에서 이윤 몫이 커지는 게 실증적으로 증명됐다. 코로나 후 원자재 값이 폭등했고, 전쟁으로 공급망이 붕괴됐다. 기업들은 이런 이유를 대며 가격을 올렸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가격을 올린 정도가 정당한지 어떤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정보 비대칭성 때문이다. 예컨대 소비자들이 모든 정보를 잘 소화해 라면 값 인상 이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 구매 전환을 하거나 아예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껏 구매 전환은 없었다. 기업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단기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격을 올렸고, 이윤 주도 인플레이션이란 말도 나오게 됐다.”

- 반론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미국 보수 성향 싱크 탱크 케이토(Cato) 연구소는 ‘기업들이 탐욕으로 자기 배만 채운다고 설명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코로나 팬데믹 때 정부의 느슨한 재정 확장 정책과 중앙은행의 신용(돈) 풀기가 인플레이션 원인이라고 본다. 수요로 생긴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이다. 팬데믹 때 돈을 쓰지 못했던 사람들이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상황에서 수요가 갑자기 폭발해 나타난 현상이란 것이다.”

◇ 담합과 가격의 메커니즘

- 한국에선 라면플레이션이 이슈다. 독과점 시장에서 원자재 값 하락이 가격에 바로 반영되지 않는 건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 경쟁 시장이라면 기업들은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독과점 시장에선 경쟁 기업이 어떻게 대응할까 생각해 가격을 조정한다. 가격을 좀 낮춰 점유율을 늘릴 수 있지만, 섣불리 가격을 낮췄다가 ‘가격 전쟁’이 터지면 점유율도 늘리지 못하고 이윤만 줄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엔 가격을 유지하면서 단기에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YONHAP PHOTO-2081> 정부 권고 이후 라면·제과·제빵업계 제품 가격 조정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농심이 지난 1일부터 신라면과 새우깡 가격을 내렸고, 삼양식품도 삼양라면과 짜짜로니 등 12개 제품의 가격을 순차적으로 인하한다. 사진은 2일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라면 판매대 모습. 2023.7.2 ryousanta@yna.co.kr/2023-07-02 14:40:13/ <저작권자 ⓒ 1980-202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공정위가 2012년 라면 가격 담합에 과징금 1354억원을 매겼지만, 대법원은 2015년 담합으로 보지 않았다.

“경쟁 상대 기업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해 행동하면, 그 결과는 담합했을 때와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기업들이 가격 전쟁을 자제하면, 결국 담합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지배적 견해는 이는 독과점이란 산업 구조상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의 없는 담합’이나 ‘묵시적 담합’이라 부른다. 그런데 법원은 기업들이 가격을 어떻게 정하자고 합의했어야 담합이라고 본다. 경제 부처와 법원이 보는 담합 개념이 달랐던 것이다.”

- 이럴 경우 우리보다 독과점 규제가 강한 미국은 어떻게 할까.

“미국은 연방거래위원회(한국의 공정위)법 5조에 불공정한 경쟁 방법은 다 규제할 수 있게 해 놨다. 담합 촉진 행위라 부르는 것까지 처벌한다. 예컨대 선도 회사가 가격을 바꿀 것이라고 공표하면 합의가 없어도 다른 업체들이 다 따라 하게 되는데, 이것도 담합 촉진 행위라 본다. 한국도 합의 없이 서로 정보만 교환해도 불공정 행위로 봐야 한다.”

◇ 20세기 초 미국의 반독점 정책

- 미국은 어떻게 독과점 가격을 잡았나.

“1890년 당시 미국 경제에 범람하던 트러스트(기업 결합)를 부수기 위해 세계 최초로 독점 기업을 해체할 수 있는 ‘셔먼법’을 만들었고, ‘트러스트 분쇄자(trust buster)’로 불렸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1~1909년 재임 중 그 법으로 트러스트를 거의 다 기소했다. JP 모건이 만든 석탄, 철도 거대 기업 노던시큐러티스는 1904년 해체 판결을 받았고, 석유를 독점했던 스탠더드오일은 1911년 34회사로 분할됐다. 1914년엔 연방거래위원회법, 클레이튼법이 제정돼 반독점 3법이 완성됐다. 미국에 이런 역사가 있어서 오늘날의 경쟁적인 산업 조직과 구조가 형성됐다.”

'트러스트 분쇄자'라고 불렸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 너무 과도한 규제란 말은 없었나

“1980년대 말 미국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연방 대법관 후보까지 올랐던 로버트 보크의 ‘반독점 패러독스’란 책을 번역했다. 그 책의 핵심은 1960~1970년대까지 ‘대기업은 모두 나쁘다(big is bad)’란 정신으로 추진했던 미국 반독점 정책을 비판하면서, 반독점 정책은 경제 이론과 산업 조직 이론에 의해 가이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의 문제된 행위가 국민 경제에 좋은지 나쁜지 가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1981년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 이후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분할 명령은 법원이 승인하지 않았다.”

-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나

“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 경쟁할 때보다 독과점일 때 가격이 높아진다. 그러나 산업이 독과점되는 것도 이유가 있다. 기업 규모가 커져야 효율적 생산이 가능하다. 또 R&D(연구 개발) 투자도 가능하다. ‘독과점 때문에 가격이 높아지니 기업을 무조건 분할해야 된다’는 맞지 않는 얘기다. 그래서 경제 분석이 굉장히 중요하다. 불법 적발도 중요하지만, 경쟁적 환경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 21세기 한국의 독과점 가격 잡기

- 한국이 미국보다 독과점이 심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내수 산업은 다른 나라보다 집중도가 높다. 시장 규모가 작고, 1960년대 고도성장 과정에서 일부 기업에 자원을 집중해 규모의 경제를 키우며 성장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독과점 부작용을 막기 위해 1970년대엔 ‘물가안정법’으로 가격을 직접 통제했다. 그러다 1980년 공정거래법을 만들고 독과점과 담합을 막아 경쟁을 촉진하는 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 한국에서 독과점 가격 잡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민간 기업을 직접 압박하는 건 하수(下手)라 할 수 있다. 고수라면 경쟁을 촉진하는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선 보수나 진보나 모두 가부장적으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가 터지면 정부 권한을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니까 기업은 정부 눈치만 보게 된다. 정부 권한을 강화하지 말고 이해관계자나 시민 권리를 강화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 집단소송제를 전반적으로 도입하고, 징벌적 손해배상도 확대해야 한다. 또 한 산업에 적어도 세 기업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3곳이 가격 경쟁도 하고, 제품 개발도 열심히 하게 해야 한다. 한 기업이 한 산업이 되는 건 곤란하다. 197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존 힉스는 ‘독점의 최대 보상은 조용한 삶(quiet life)’이라고 했다.”

◇ 기업 권력, 통제해야 할 이유?

- 경제학자로서 공정 거래에 관심을 둔 이유는

“미국 유학 때 보니 한국 유학생들은 미국서 경제학을 공부하지 경제를 공부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론, 실증 분석 방법은 많이 아는데, 미국 경제정책이 어떻게 형성됐고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미국의 반독점 역사와 이론 등을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한국도 이런 정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신광식 박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정동 조선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 보수 경제학자면서 재벌 개혁을 외치는 이유는

“미국의 대표 반독점법인 셔먼법은 공화당 정부 때 입법한 것이고, 그걸 실행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공화당 출신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하면서 번영하려면, 경제 권력이 시장에서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걸 막아야 한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없으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 경제적 효율성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 경쟁을 막고 부를 파괴하는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 한국에서 로펌 소속 이코노미스트는 드문 것 같다.

“미국 공정 정책 당국인 연방거래위원회엔 이코노미스트가 수백 명 있다. 반독점 정책의 다른 한 축인 법무부(DOJ)에도 이코노미스트가 40~50명 있다. 이에 대응하려 로펌도 이코노미스트를 뽑거나 외부 경제 분석 기관과 협업한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 단순히 위법성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국민 경제와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따져 볼수록 한국 경제정책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신광식 박사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울산대 교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연세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고, 2001년부터 김앤장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있다. 공정 거래, 재벌 정책 등을 연구해왔다. 학계에선 ‘걸어다니는 공정거래법’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윤 주도 인플레이션

기업들의 과도한 이윤 추구로 인플레이션이 강화된 걸 가리킨다. 국제통화기금(IMF) 소속 경제학자 닐스 제이콥 한센, 프레데릭 토스카니, 저우징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유럽 인플레이션에 이윤이 45%의 영향을 줬다는 분석을 했다.

▲독과점 시장

공정위는 상위 1개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3개 이하 업체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75% 이상인 경우 독과점 시장으로 본다. 예컨대 라면 시장은 상위 4사가 95%쯤 장악하고 있는데, 1위 농심은 작년 상위 4사 중 점유율이 56%여서 독과점 시장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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