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노란봉투법’을 위한 기도

기자 2023. 7.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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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 사회혼란 속에 나폴레옹의 조카가 나폴레옹을 흉내 내 황제에 오르자 카를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이다. ‘노란봉투법’이란 노동개혁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이 말이 떠올랐다. 비극은 1989년에 일어났다. 1980년 전두환은 광주학살 뒤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라는 위헌적 조직을 통해 반민주적인 유신 노동법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 노동악법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터져 나왔고, 여소야대의 국회는 1989년 반민주적 요소를 일부 완화한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노태우는 거부권을 행사했고 노동개혁은 실패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우리는 노동법 개혁에 대한 두 번째 대통령 거부권을 앞두고 있다. 흔히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에 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기업은 파업 노동자들에 무차별하게 손해배상 소송을 하고, 신원보증인에게까지 배상청구를 함으로써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과 주변을 파멸시켜 왔다. 이 법은 잘못된 관행을 개선해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배상의무를 개별적으로 정하도록 하며, 택배노동자 등 하도급에 놓여 있는 특수형태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해 공식계약자는 아니지만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결정을 하는 원청기업을 사용자에 포함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파업노동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노동기본권을 넘어서 최소한의 생존권마저도 박탈하는 것으로 문명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근대적 야만이다. 이 같은 비인간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직접 개혁을 촉구한 바 있다. 대법원도 최근 귀책사유나 기여도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했다. 사용자 문제도 법원이 CJ대한통운에 대해 택배노동자들과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사용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한마디로, 노란봉투법은 이제야 만들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법이자 사법판결을 사후적으로 입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의당, 진보당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지지하고 있고, 국회 본회의에 곧바로 회부하기로 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는 갈수록 극우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다. 국민의힘은 이 법안에 대해 여러 괴변을 늘어놓으며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고, 윤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1989년 노동개혁법 거부권 행사의 비극이 일어난 지 34년 만에 대통령 거부권에 의해 노동개혁이 다시 한번 좌절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주목할 것은 이번 사태는 마르크스의 예언처럼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사실이다. 노란봉투법을 “민주당이 왜 문재인 정권 시절에 통과시키지 않다가 이제 와서야 야단법석 떨며 할리우드 액션을 보이고 있나?” 얼마 전 기사에 난 인용문을 보고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 무릎을 쳤다. 한데 이 말을 한 사람이 진보인사가 아니라 극우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희극이 따로 없다. 그에 따르면, 자신들 집권 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이 법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예상됨에도 강행 추진하는 거대 야당의 저의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그것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놀부 심보”이자 “윤석열 정부를 흔들어 일 못하게 만들겠단 의도”라는 것이다. 그렇다. 정확히 더불어민주당이 정권을 쥐고 있었고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이 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기간이 1년10개월, 정확히 664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노동자들을 외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윤 정부를 흔들기 위한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김 대표의 비판이 일리가 있는 이유다. 아니 그가 틀렸을 수 있다. 자신들이 집권했고 국회 다수의석을 차지했던 2020년 7월14일부터 2022년 5월9일까지는 몰랐는데, 정권을 내주고 나니 갑자기 노란봉투법이 노동자 생존권을 위해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수 있다. 반갑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각성이며 법 제정의 역사적 사명을 방기한 원죄는 남는다. 결국 이 법이 거부권으로 좌절된다면, 이는 윤석열과 국민의힘 주연, 더불어민주당 조연, 아니면 공동 주연의 희극이다.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 같은 희극이 생겨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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