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환대한다는 것

기자 2023. 7.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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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참석이 결정된 날, 온 가족이 시름에 잠겼다. 학술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쁨보다 중증장애인 홀로 유럽행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작고 휘어진 몸, 뒤뚱거리며 겨우 목발을 짚고 서 있는 장애인이 낯선 타국에서 끼니를 때우고, 화장실에 가고, 한참을 걷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별일 없으리라 호언장담하고 말았지만, 당사자인 나조차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타국의 공항에 내려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이해 못할 말이 가득 찬 버스 안에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곤 가방을 꼭 쥐는 것뿐이었다. 나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만만한 시비 상대이자 범죄의 표적으로 비추어질까 걱정됐다.

바짝 긴장한 탓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나는 공중화장실 행렬 사이에 줄을 섰다. 머지않아 한 흑인 아저씨가 내 곁으로 다가왔고,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그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무어라고 말했지만, 나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만 가로저었다. 답답함을 느낀 그는 직접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킨 채 그를 쫓았다. 목적지는 변기 칸이었다. 장애인이 오래 서 있기 힘들 것 같다며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먼저 화장실을 사용하게 하려는 배려였다.

볼 일을 마치고, 풀린 긴장에 목이 탔던 나는 물을 한 통 가득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다음 빈 물통을 손에 쥐고 목발을 짚으며 엉거주춤 걸었다. 잠시 후 어느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에게 손짓으로 물통을 달라고 하면서, 멀리 있는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나의 빈 물통을 받아 들고는 쓰레기통을 향해 떠났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 시내 대중교통 파업을 마주한 날이었다. 파업으로 아수라장이 된 만원 버스 사이에서 목발을 짚고 설 틈을 찾지 못해 탑승을 주저할 때, 이번에는 문 앞에 선 인도계 학생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버스 위에 올랐다. 멀리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본 승객들은 만원 버스의 소란 사이에서 “웰컴”이라고 소리 치며 박수를 쳤다.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시민 몇은 내 뒤를 한동안 막아 서주었다.

잇따른 세 가지 환대의 경험은 조건 없는 동정과 사랑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타국에서 나는 서류상 장애인임을 증명할 수 없었음에도, 그들은 나를 지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화장실을 안내한 사람, 짐을 들어준 사람, 손을 내민 사람들의 환대는 오로지 연민과 사랑 그리고 배려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의 도움으로 연달아 위태로움을 벗어나는 경험 속에서, 문득 한국이 좋아 여행을 온 외국 장애인 관광객들이 떠올랐다. 과연 그들도 사랑에서 기반한 환대의 마음을 느끼고 돌아갈 수 있을까.

부디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낯선 타국에서 취약성이 드러나는 소수자 이방인이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최첨단 기술이나 친화적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고, 결국 사람의 사랑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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