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적극적 우대조치의 끝?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29일 대학 입시에서 소수인종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지원자 개인의 성적이나 성취가 아닌 인종을 입학 전형에 고려하는 것은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4조에 어긋난다는 판단이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시작돼 1978년 캘리포니아, 2003년 미시간 그리고 2016년 텍사스의 각 주립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결을 받아 이어지던 적극적 우대조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미국의 보수 진영이 수십년에 걸쳐 그 철폐를 위해 노력한 결과인데, 이번 판결 역시 정확하게 대법관들의 이념 성향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미국에서 찬반 양측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인종 차별과 입시가 겹친 민감한 문제인 데다, 특히 이번 소송에서 아시아계가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비해 역차별을 받았다는 점이 주된 쟁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적 좋은 한국계 유리’ ‘공부 잘하는 아시아계는 왜 하버드의 소수인종 우대에 반대했나’ 같은 기사 제목은 한국 언론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판결은 적극적 우대조치를 둘러싼 법리적 쟁점이나 역사적 의미, 중장기적으로 미국 대학에 미칠 영향 등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점이 많지만, 이 칼럼에서는 정치적·정책적 쟁점이 사법부를 통해 해결될 때 벌어지는 현상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적극적 우대조치 자체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지만,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되고 법률가의 관점이 최종 결정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선 합헌과 위헌은 동일한 법적 쟁점에 대한 일도양단의 판단 같지만, 그 실천적 의미는 꽤 다를 수 있다. 적극적 우대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은 ‘금지된다’는 단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 합헌 판결은 ‘해도 된다’는 것이지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적극적 우대조치가 합헌일 때에는 개별 대학이 판단해 결정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위헌이 되면 대학 당국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결국 하버드와 같은 사립대학의 전형방식까지 법원이 결정하는 셈이 되었는데, 이런 역할이 사법부의 본질에 맞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개별적 권리관계에 관한 다툼이 아닌 정책 문제인 경우, 특히 당사자들이 그 정책의 지향 자체를 포기하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대법원 판결로도 이에 관한 분쟁은 종결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주는 1996년에 아예 주민투표를 통해 적극적 우대조치를 금지했는데, 학생 구성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대학들은 이를 대체하는 수단을 찾아냈다.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 의과대학원은 지원자의 가구소득, 부모의 학력, 출신 지역 등을 고려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지수를 입학 전형에 반영했고, 그 결과 가장 다양한 학생들로 구성된 의과대학원이 되었다. 보수 진영은 이번 판결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인종을 입시에 고려한다는 의심이 드는 대학에 대한 적극적인 소송전을 예고했다. 하지만 대학이 학생 구성의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성적 외의 요소를 고려할 수밖에 없고 입학 전형 기준에 관한 소모적인 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생각해볼 부분은 적극적 우대조치의 합헌성을 인정한 판결이 불과 7년 만에 뒤집혔다는 점이다. 적극적 우대조치에 대한 논의는 오랜 기간 지속돼 왔고, 2016년과 2023년 사이에 극적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 직전 판결의 다수 의견은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보수 대법관 앤서니 케네디가 집필했다. 그사이 달라진 사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 3명을 임명했다는 점이다. 선거 결과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대법원 판결은 대법관이 하는 것이니 사람이 바뀌면 판결이 달라진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7년 사이에 기초가 되는 사실관계나 법적 논증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에도 대법원 구성이 바뀌자 판결이 정반대로 달라지는 것 자체가 대법원이라는 기관 그리고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를 침식한다.
인종차별 해소라는 미국의 한때 시대정신을 대표했던 적극적 우대조치는 이번 판결로 끝났지만, 사실은 끝이 아닐지 모른다. 적극적 우대조치를 낳은 사회적·경제적 상황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법원의 판결로 이슈 자체를 끝내기는 어렵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판결을 사회 변화의 계기나 수단으로 삼으려면 명심할 일이다. 대법원 판결은 법적으로 불복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는 최종적이지만, 최종적 문제 해결은 아니라는 점을.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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