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의 에볼루션] 킬러 문항은 대학에로
그동안 우리는 학생에게
킬러 문항을 던져주고
마치 ‘오징어게임’
탈락자를 관람하는
방관자처럼 살았다
이제 킬러 문항은
대학으로 넘기고
그들이 풀게 하자
그리고 잘 풀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말자
진정한 교육은 학생들이
이력서가 아닌 질문을 품고
세상에 나가게 하는 것이다
“한 학기 동안 제 인생이 이렇게 변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 학기를 열심히 달려와 보니, 혹시 창업에는 실패할 수 있어도 인생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를 변화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간증이 아니다. 신설된 지 채 1년도 안 된 창업대학에서 매 학기 말 들을 수 있는 학생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고백하자면(자랑을 좀 하자면), 20년 경력의 대학 선생으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시절은 없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수학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대한 논란이 있다. 교육부 장관이 있는데, 왜 대통령이 나서서 이런 지시를 내리는가가 핵심은 아니다. 입시에서 사교육을 통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극소수만 풀 수 있는 문제를 왜 내느냐도 핵심이 아니다. 핵심 질문은 ‘킬러 문항을 누가 풀 것인가’여야 한다.
수능 만점자 수는 걱정하지 말고 수능을 자격시험처럼 설계하여 말 그대로 ‘수학능력’만 측정하고, 대학 저마다의 기준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면 문제는 의외로 쉬워진다. 하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수학에서 사라진 킬러 문항이 다른 영역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교육부는 어떻게든 입시에서의 변별력을 추구할 것이고, 각 대학은 입학 커트라인 점수로 환산된 입시 결과(입결)를 통해 대학 서열화를 공고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와 대학의 가장 큰 관심사가 기존처럼 입시, 즉 문턱 넘기에 집중되어 있다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다르게 교육을 한들, 대학 순위는 입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입결 순위는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연세대학교가 모 평가기관이 발표한 세계 대학 영향력 순위에서 14위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 몇년 동안 연세대가 글로벌 이슈에 대한 문제 해결과 리더십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의미 있는 성취였다. 하지만 우리 미디어는 큰 관심이 없었고 단신으로 처리하는 정도였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높은 위치에 있지 않는 순위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국내 대학이 전 세계 대학 중 종합적으로 몇 등을 했느냐에만 관심이 있지, 우리의 각 대학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저마다 개성있는 대학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왜 우리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같은 대학들이 우리의 앞자리에 없는 순위라고 하면 ‘에이, 별 의미 없는 순위네’라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우리 스스로가 대학의 독자적인 미션과 비전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남들의 뒤만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류 대학 평가기관들은 다양한 여러 대학들을 부당하게 한 덩어리로 묶고 근본적으로 동일한 여러 대학들을 아무 의미 없이 세분화하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다. 기준들이 충분히 다양하지 못하고, 그 다양한 기준들이 왜 중요한지가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다. 가령 대학 혁신을 위해 얼마나 새로운 교육적, 행정적 시도를 감행하는지를 놓고 본다면 순위는 달라질 수 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순위에서는 미네르바 대학이 맨 앞에 있고,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맛없는 분식점 같은 우리 대학들
각 대학은 ‘우리는 입학생을 어떠한 학생들로 길러내겠다’라는 비전을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만, 그 비전들부터가 모두 대동소이하다. 마치 우리 대학은 모든 메뉴를 판다고 선전하는 밋밋한 분식점처럼 보인다. 가령 칼국수만을 기가 막히게 요리하는 맛집 같은 대학은 희귀하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은 그냥 유명한 집이지만 맛은 별로인 식당에 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맞는 맛집 대학을 찾는 일도 힘들지만(별로 없으니까) 그런 시도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더 힘들다. “저는 기후위기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싶고 그런 것을 잘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A대학으로 정했어요”라는 말에 학부모, 교사, 학원 선생은 설득하기 시작한다. “B대학 갈 점수가 충분한데 이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주는 불안한 시선은 맛집 대학의 탄생을 방해한다. 청년이 느끼는 불안은 그의 내면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로부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청년 스스로가 앞날에 대한 주체적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적절한 염려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모의 두려움이 청년에게 투영된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부모의 걱정을 그의 자식들이 대신 짊어지고 있는 경우다.
물론 모든 부모는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갖 걱정을 다 하신다. 하지만 그 부모의 걱정과 조언이 늘 적절하거나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세계와 청년의 세계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매일 부딪히고 겪는 세상에서 각자에게 꽂힌 것들을 부모는 다 모른다. 청년들이 중요하다고 느낀 지식과 가치들에 대해 그분들도 똑같이 공감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분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이런 주변의 불안이 수직적으로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나 선배, 그리고 주변의 여러 멘토들도 불안을 수평적으로 전달하는 주체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불안이 본인에게 전파되는 것은 아닌지 매사에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교수들도 이 불안감 조성에 일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왜 가르치는지 설득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일이 목적이나 의미를 따지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학생들을 그저 외우고 요령만 익히는 교육으로 내몬다.
우리 모두는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은 뭔가를 채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채워지면 다른 게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불안이 우리를 더 이상 움츠리게 하지 않는 순간은 그것이 더 위대한 가치들로 대체될 때일 것이다.
우리가 대학 교육에 자신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가 교육의 실제 목표를 학생 개개인의 성장보다 선발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심각하고 우리 사회의 고유한 문제로서 거의 집착증 수준이다. 입시 문턱을 기형적으로 설계하다 보니 학생, 교사, 학부모, 학교, 사교육 업체 등 교육의 모든 주체들이 문턱 넘기에 모든 연료를 소진하다. 그런 후에는 주저앉는다. 사실 문턱을 넘는 이유는 다음 단계에서 더 성장하기 위한 것인데 문턱 넘기가 끝인 것처럼 모든 구조가 설계되어 있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준비 과정에서 보여줬던 열정과 호기심은 거짓말처럼 싹 사라진다. 마치 그런 것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이런 현상을 ‘문턱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다. 문턱 증후군에 걸린 시민들로 구성된 ‘문턱 사회’는 시민의 생활사에 다양한 문턱들을 더 촘촘히 배치함으로써 시민들의 삶을 더 정교하게 통제하게 된다. 결국 문턱 사회에서 지식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문턱은 흥미로운 또 한 번의 시작
우리 사회에는 교육의 본질을 왜곡해야만 더 잘 통과할 수 있는 문턱들이 과도하게 많다. 이런 사회에서 인류의 빛나는 지식들은 입시를 위한 사지선다형 문제일 뿐이다. 대학 교육은 학점을 잘 따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대학생들은 또다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입사 시험에 매진한다.
자, 이강인 선수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마요르카 구단에서 멋진 시즌을 보냈다. 며칠 전 그는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이적하였고 다음 시즌부터는 음바페, 네이마르와 한 팀에서 뛰게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입단과 동시에 꿈을 이뤘다는 자만심에 열정을 잃고 경기에서 슬슬 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물론 그럴 리는 없다)? 아니 심지어 벤치 멤버로 경기에 나가지 못해도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틀림없이 열성적인 팬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할 것이고, 팀은 그를 재빨리 방출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PSG라는 문턱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가 이루는 성장과 멋진 활약인 것이다. 문턱은 흥미로운 또 한 번의 시작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의 의미와 재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대학생들의 금기 문항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함께 풀어나가야 할 대학의 킬러 문항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킬러 문항을 던져주고 마치 <오징어게임>의 탈락자를 관람하는 무책임한 방관자처럼 살았다. 이제 킬러 문항은 대학으로 넘기고 그들이 풀게 하자. 그리고 잘 풀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말자. ‘대학에서의 공부와 경험이 인생을 바꾼 시간이었다’는 고백은 불가능한 미션이 아니다(아니었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들이 이력서가 아닌 질문을 품고 세상에 나가게 하는 것이다.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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