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창칼럼] 영아들이 사라지는 나라
한 간호사 집념으로 세상에 드러나
정부·국회 그간 뭐했는지 반성해야
‘위기 임산부’ 원스톱 지원센터 시급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유령 아기’ 유기·살해 사건은 한 간호사의 집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20년째 보육원에서 일하는 이다정 간호사는 몇 년 전 경북 안동에서 친모가 신생아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숨진 아기의 B형간염 1차 예방접종 기록이 있는데 출생신고는 안 된 것으로 드러나서다. 출생아 접종 기록보다 출생신고 수가 적은 것을 알고는 출생 미신고 영아가 많다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수사로 속속 드러나는 범죄 행태는 끔찍하다. 광주에서는 생후 6일 된 딸을 방치해 숨지게 한 뒤 종량제 봉투에 담아 쓰레기 수거함에 버린 30대 친모가 붙잡혔다. 대전의 20대 엄마는 병원에서 아들을 낳은 뒤 한 달 만에 살해하고 인근 야산에 파묻었다. 미혼모들로부터 신생아들을 200만원 이하로 사 불임 부부에게 되판 브로커 여성도 발각됐다. 주요 8개국(G8) 진입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진 일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영아들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건 납득이 안 된다. 세계 최악의 저출산에 국가소멸까지 걱정하면서 태어난 아기들조차 보듬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정부는 사각지대, 행정 연계 체계 미비 탓이라고 변명한다. 그 많은 복지 관련 공무원들은 도대체 뭘 한 건가. 관련 공무원 중 한 명이라도 이 간호사처럼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게다. 정부, 국회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반성해야 한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국회는 화들짝 놀라 의료 기관이 신생아의 출생 정보를 지자체에 의무적으로 알리는 ‘출생통보제’를 지난달 30일 통과시켰다. 관련 법안은 몇 년 전에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잠자고 있었다. 전형적인 뒷북 대응이다. 문제는 출생통보제가 ‘병원 출산’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출산을 숨기려는 미혼모들이 병원 출산은커녕 신생아 진료조차 기피할 수 있다. 영아 생명이 더 위험해질 것이란 우려가 일고 있다. 그래서 산모가 병원에서 익명으로 낳은 아이를 국가가 보호하는 보호출산제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일부 논란이 있지만 어떤 부작용도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할 순 없지 않겠나.
근본적인 해법은 미혼모 등이 키우기 어려운 영아들을 국가가 맡아 양육하는 시스템 도입이다. 미국은 부모가 생후 3∼60일 된 아기를 응급실·소방서 같은 공공기관에 데려다 놓으면 국가가 보호하고, 일절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 같은 ‘영아피난제’를 1999년부터 운영해 4500여명의 아기를 살렸다. 독일은 1300여곳의 임신갈등지원센터를 운영해 출산을 고민하는 미혼모에게 상담과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 프랑스는 2006년 혼외출산 구별 규정을 없애 아기를 낳으면 각종 혜택을 준다.
지금도 갓난 아기들이 ‘베이비박스’에 버려지고 있다.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 빈곤 등 영아 범죄의 주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연간 수십조원에 달하는 저출산 예산은 이런 데 써야 하지 않겠나. 임신 상담, 출산 지원, 사후관리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해야 ‘위기의 임산부’들이 믿고 찾아올 것이다. 아기가 버림받아 목숨을 잃는 사회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더 이상 미적거릴 때가 아니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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