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유명해져라, 유명해져라
비호감·노이즈마케팅 마다 안 해
숙고해야 할 문제도 구경거리로
국민 주의 돌리고 권력 발판삼아
‘유명해져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셀러브리티’ 제1화 제목이다. 이 말대로라면 셀러브리티(셀럽)는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유명하다는 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어 수가 많다는 뜻이다. 셀럽의 영향력은 팔로어 수로 정량화된다, 팔로어 수가 지위와 돈, 권력이 된다. 뻔한 얘기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이 현상을 뻔하게 여긴다는 것에 있다.
추종자의 관음을 이끌기 위해 셀럽과 포퓰리스트는 특유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면서 지속적으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이 연극으로 극적인 서사가 구축된다. 추종자는 이 연극의 관객이 아니다. 그들은 기꺼이 연극의 출연자로 자처한다. 팔로어와 추종자에게 ‘이름’이 주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름으로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면 이들은 만들어진 정체성에 따라 환상을 스스로 생산한다. 이 환상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면서 셀럽과 정치인에게 다시 반향되며 주술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세계에서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릿하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초현실(hyperreality)이 발생한다. 셀럽과 정치인 중에 ‘리플리’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세심하게 선택된 이미지를 연기하고 편집된 자신의 시뮬레이션 이미지를 보면서 스스로도 그것이 진짜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여기서 탈진실(post-truth)도 파생된다.
관심 경제의 논리가 SNS와 정치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비호감 이미지나 노이즈 마케팅조차 ‘관심’이므로 인기를 얻는 치트키가 되기도 한다. 추종자뿐 아니라 ‘안티’까지도 유명세에 수렴된다. 팬덤은 역설적으로 안티가 있어야만 만들어진다. 안티는 팬덤의 전제 조건이다.
포퓰리스트는 논란을 이용하여 인지도를 높이고 이것은 정치 권력의 발판이 된다. 물론 포퓰리스트도 정치인답게 슬로건이나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복잡하거나 진지하면 안 된다. 추종자에게 즉각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야 하므로 원색적이고 선정적이어야 한다.
포퓰리스트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도 구경거리를 만들어 버린다. 국민을 중요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가린다. 이 은폐의 능력으로 포퓰리스트는 더 높은 권력에 기생할 수 있게 된다. 포퓰리스트의 정치적 연극은 한편으론 대중을, 한편으론 더 높은 권력을 향해 있다.
수족관 물을 마시는 정치적 연극은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 모순을 잊게 만든다. 이 기이한 스펙터클은 어그로를 발생시키고 논의의 심각함을 희석시킨다. 정치인의 선정적인 행위는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여러 매체에서 더 기이한 이미지와 서사로 증폭된다. 만약 의도된 것이라면 그 정치인은 잠깐의 기행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된다.
동료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도 이 맥락 위에 있다. 그 정치인의 목표는 전직 대통령과 동료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에 있지 않다. 목표는 자신의 인지도다. 옅어져 가는 인지도를 사라지기 전에 복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그로를 끄는 것이다. 자신이 가졌던 ‘투사’의 이미지를 과장되게 연기하고 자신의 분노 퍼포먼스를 이용하는 스펙터클 연출이다. 미디어 플랫폼은 정치적 연극의 무대가 된다. 무대 위에서 익명의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괜찮다, 주목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치인은 부정적 관심이 긍정적 권력으로 환원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셀러브리티’ 포스터에는 “나를 죽인 것은 나의 팔로워였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장은 표면의 사실만 담고 있다. 셀럽은 팔로어에 의해 죽지 않는다. 셀럽과 팔로어는 상생하면서 공멸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와 팬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둘은 외부의 힘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스스로 내파되면서 자멸해 간다.
무엇을 하기보다 하지 않기가 더 어려워진 세상이다. 이 시스템을 탈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내부’에서 살기 위해서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SNS도 버릴 수가 없는 것 같다. 내부에서 외부를 향하는(outside in) 지속적인 원심력을 주장하는 것도 사변처럼 여겨진다.
초현실과 탈진실 유포에 무고한 자는 없다. 스마트폰 위에서 스와이프를 지속하고 있을 때, 그 손가락에서 초현실과 탈진실이 전파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문제를 헤쳐 나가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나의 손가락을 알고리즘이 인도하는 쇼트폼에서 떼어내는 것, 그리고 기꺼이 방황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초현실과 탈진실 시대의 저항은 타인을 향해 있지 않다. ‘나’를 향해 있다. 진실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먼저 반론해야 한다. 나에게 반박할 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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