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US여자오픈에서 신지애·하타오카가 증명한 '약한 것이 강하다'

방민준 2023. 7. 1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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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78회 US여자오픈에서 준우승한 신지애 프로. 사진제공=USGA/Kathryn Riley

 



 



[골프한국] 일찍이 노자(老子)는 물의 성질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삶의 지표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하여 물 흐르듯 하는 삶을 권유했다.



 



물 흐르듯이 살아간다는 것은 곧 부드러운 삶을 말한다. 이 세상에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는 물만큼 강한 것이 없다고 보았다. 부드러움의 위력에 심취한 노자는 도덕경 36장에서 '柔弱勝剛强'(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설파하며 이들 두고 '미명(微明)' 즉 미묘하고도 명백한 이치라고까지 했다.



 



노자의 부드러움과 약함에 대한 철학은 골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력이 짧은 골퍼일수록 온갖 상황의 악조건과 맞닥뜨리는 골프장에서 쇠처럼, 바위처럼 강하고 격하게 부딪히고 대든다. 장애물을 만나도 거기에 순응하려 들지 않고 무모하게 이기려 든다.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돌아갈 줄 모르고 정면 돌파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자세가 간혹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줄 때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실패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골프장에서 마음속으로 전의를 다지며 도전욕에 불타는 골퍼는 골프라는 경기 자체를 나와의 조화를 통해 고도의 즐거움을 찾는 운동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골프를 도전하고 극복하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즉 골프의 모든 것을 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구력이 한 해 한 해 늘어가고 골프의 이치를 깨달아갈수록 적대감은 줄어들고 그 자리엔 조화와 평정이 자리 잡아간다. 물론 모든 동작은 보다 부드러워지고 간결해져 무리가 없어진다. 핸디캡이 낮은 골퍼일수록, 구력이 오랜 골퍼일수록 샷이 부드럽고 코스공략에도 무리나 억지가 없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골프채를 잡으면서 평생을 '힘을 빼라'는 화두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도 골프라는 운동의 요체가 바로 부드러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페블비치 골프링크스(파72)에서 막을 내린 제78회 US여자오픈에서 신지애(35)와 하타오카 나사(24)는 노자의 철학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오히려 '柔弱勝剛强' 단계를 넘어 '유약충약결(柔弱充弱缺, 부드럽고 약함이 약함과 부족함을 채운다'는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두 선수 모두 157cm의 단신이다. 드라이브 비거리도 240~250야드 안팎으로 이른바 '짤순이'들이다. 골프선수로서 불리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로골프의 정글에서 도태되지 않고 버텨내는 것도 대단한데 심심찮게 우승을 거두기도 하고 매번 우승 경쟁을 벌인다는 게 기적처럼 보인다. 특이 이번 US여자오픈에서 장타들 틈에서 끝까지 우승 경쟁을 벌이는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3라운드까지 합계 2언더파 214타로 선두 하타오카 나사에 5타 뒤진 공동 5위로 출발한 신지애는 4라운드에서 짧지만 정확한 드라이브샷, 감각적인 퍼팅으로 타수를 줄여 최종 합계 6언더파로 찰리 헐(27·영국)과 함께 공동 2위에 올랐다. 



 



한국투어 21승(아마추어 1승 포함), LPGA투어 11승(메이저 2승), 일본투어 27승에 호주와 아시아 투어 등 통산 64승을 거둬 '살아있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가 은퇴를 고민할 나이에 메이저 대회에서, 그것도 2019년 US 여자오픈 이후 4년 만에 출전한 대회에서 준우승했다는 것은 기적이다.



 



202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제78회 US여자오픈에 출전한 하타오카 나사. 사진제공=USGA/James Gilbert

 



 



1타 차 선두로 마지막 라운드를 맞은 하타오카 나사는 신지애와 닮은꼴의 견고한 플레이로 우승을 내다봤으나 투어 2년차 답지 않은 견고한 경기력을 뽐낸 하와이 출신 앨리슨 코푸즈(25)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공동 4위에 머물렀다. 몇 번의 결정적 기회를 놓쳐 모처럼 찾아온 우승 기회를 잡진 못했지만 하타오카 나사의 플레이는 약하고 부드러움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단신인 두 선수의 선전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부단한 노력이 강한 경쟁력의 원천임을 실감케 한다. 



 



투어 2년 차에 LPGA투어 첫승을 US여자오픈에서 거둔 앨리슨 코푸즈의 경기력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하다. 하타오카 나사에 1타 뒤져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한 코푸즈는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 최종합계 9언더파로 공동 2위와 3타차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가 필리핀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한국 골프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버지 마르코스 코푸즈는 30년 이상 근무한 퇴역 미군 대령으로 독일, 한국 등 여러 나라를 옮겨다니며 코푸즈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었고 호놀룰루의 육군 의료센터 간호사 출신의 어머니는 코푸즈에게 근면성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졸업한 호놀룰루 푸나후 고등학교를 나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경영학 석사(MBA)과정을 마쳤다.



미셸 위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코푸즈도 골프천재였다. 2008년 10세 3개월 9일의 나이에 미국 여자 아마추어 퍼블릭 링크스 대회 최연소 출전 기록(종전 기록 보유자는 미셀 위)을 세웠고 USC 재학 중 두 차례 전미 대학선수로 선발됐다.



 



김효주(공동 6위) 유해란(8위)에 이어 장차 방신실과 대결을 펼칠지도 모를 화제의 신인 로즈 장(미국)이 9위를 차지했고 박민지는 디펜딩 챔피언 이민지(호주) 김세영 등과 공동 13위(4오버파 292타)에 올라 가능성을 확인했다. 최혜진이 공동 20위, 전인지와 이정은6이 공동 27위를 차지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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