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기서 일하는 게 좋아요…어른들 세상 ‘미리보기’거든요[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3. 7. 1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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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어린이와 경제
부모님 도우려 모텔 프런트 데스크에 선
중국인 이민자의 딸 ‘미아’
노동의 기쁨과 자부심도 느꼈지만
미국인의 ‘갑질’ 등 부당함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룰 거다, 아메리칸드림을

2021년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17개 선진국 성인 1만9000명을 상대로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설문한 바에 따르면 14개국에서 ‘가족’을 1순위로 꼽은 반면 한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꼽았다고 한다(경향신문 2021년 11월21일자 “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한국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 1위 꼽아” 참조). 어른의 가치관은 다음 세대에도 전해지는 법인지 우리 청소년 역시 돈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 같다. 매경이코노미가 2022년 6월 만 13~18세 청소년 494명을 대상으로 ‘10대 청소년 경제 활동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돈(물질적 풍요)’이라고 답한 청소년이 30.1%(280명, 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두 조사만을 놓고 ‘한국인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돈을 최고로 여긴다’고 단편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의식이 발생한 사회문화적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조사 결과가 우리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 진형민 지음 | 주성희 그림·만화 | 창비 | 2016년
나는 무늬 김해원 지음 | 낮은산 | 2021년

우리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이러한데 정작 돈을 주제로 하는 아동문학 작품은 드물다는 점이 의아해진다. 최근 돈, 경제, 금융, 세금, 투자, 주식에 대한 어린이 지식책이 쏟아지듯 출간되는 일과 비교해도 참 다르다. 아동문학은 현실 속 어린이의 온갖 면면을 살핀다고 생각했는데 돈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돈 많은 어른이 되는 걸 장래희망으로 삼는 어린이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걸까. 가난하거나 결식하는 어린이들을 줄곧 비추어왔지만 가난이 발생하는 사회적 배경이나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시야를 담은 경우는 국내외 작품을 막론하고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진형민의 동화 <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창비, 2016)와 청소년소설집 <곰의 부탁>(문학동네, 2020), 김해원의 청소년소설 <나는 무늬>(낮은산, 2021)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날 수 있던 정도다.

열 살 어린이가 부모가 관리인으로 고용된 모텔의 프런트 데스크를 맡아 일하는 <프런트 데스크>(다산어린이, 2023)는 그런 면에서 우선 놀랄 만큼 새로운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어린이가 어른과 동일한 노동을 하며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체득하는 데서 나아가 이웃과 연대하며 새로운 노동의 모습을 꿈꾼다. 열 살 어린이가 딱 버티고 서서 지키는 프런트 데스크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아래 작동하는 돈과 노동의 질서를 어떤 낭만도 없이 촘촘하게 파악하다가 질서의 변화를 기획한다.

시간 배경은 1993년, 중국인 이민자인 ‘미아’의 부모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리조트에서 3㎞ 떨어져 있는 칼리비스타 모텔 관리인으로 일자리를 얻는다. 테마파크 옆 모텔에서 숙식하고 노동하면서 테마파크 관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미아 가족에게서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엄마와 둘이 플로리다 올랜도의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 근처 모텔에 살던 ‘무니’가 나란히 떠오르기도 한다. 미아의 부모는 수십 개 방을 청소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기에 프런트 데스크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일은 미아의 몫이 된다.

별도리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미아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니? 나가서 놀지 않고?”라고 무신경하게 묻는 투숙객에게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게 좋아요”(47면)라고 대답할 만큼 자신의 노동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베개를 추가해주는 일처럼 사소한 서비스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며 타인의 필요를 충당하는 데서 오는 노동 본연의 기쁨은 미아에게 고객 의견 카드를 만들어 프런트 데스크에 비치하는 아이디어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미아는 어른 몫의 노동을 하며 어른들의 세계를 하나씩 배워간다. 어른에게 무언가를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일이 장난처럼 취급당할 때 모텔 손님들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책임자 좀 불러주세요’라고 정당하게 요구하는 법도 알게 됐다.

노동을 통해 미아가 경험한 건 기쁨과 보람, 성장이라는 밝은 면만은 아니다. 부모를 비롯한 중국인 이민자들의 노동환경을 곁에서 듣고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 또한 속속들이 경험한다. 모텔 주인 야오는 부모와 구두로 체결한 임금 조건을 뒤집고, 고장 나 새로 구매해야 하는 세탁기 비용을 지불하게까지 한다. 부모가 더 나은 조건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의 이민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술 취한 남자가 들어와 미아의 멱살을 움켜잡고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미아가 안전을 위해 제안한 방탄유리, 보안카메라, 비상벨 등 어느 것 하나 돈이 든다며 설치하지 않는다. 미아는 ‘고용주가 내 목숨을 평당 25달러보다 낮잡아 본다’며 울분을 삼킨다.

이에 더해 미아 주변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은 이 문제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 이해득실을 다투는 차원을 넘어 노동자의 인간적 존엄에 관한 일이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리 삼촌은 식사로 마요네즈 바른 식빵만 제공되자 햄버거를 포장해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퇴근 후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 먹곤 했다. 손톱을 손질하는 링 이모는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중국 가사도우미들은 손버릇이 나쁘다고 자기 앞에서 흉보는 백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들어야 했다. 자신을 ‘현대판 노예’라고 말한 장 삼촌은 식당 주인에게 여권과 신분증을 빼앗긴 채 주방에 갇혀 사실상 무급으로 일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30년 전이고 이제 그런 일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지. 하지만 1993년 미국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이 경험한 고난이 여전히 세계 곳곳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에게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중국에서 배운 피아노곡을 미아가 학교 강당에서 홀로 연주하면서 떠올리는 기억은 미아 주변 현실을 가슴 아프게 비유하는 듯하다.

프런트 데스크 켈리 양 지음·이민희 옮김 | 다산어린이 | 2023년

“왜 아름다운 곡 중간에 무서운 부분을 넣었을까요?” 언젠가 내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물었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때때로 무섭기 때문이지.”

- <프런트 데스크> 81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 면면은 자본의 질서에서 미아의 현재와 미래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조망하는 데까지 이른다. 미아의 가장 친한 친구 루페가 아빠에게 듣고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다. 루페의 아빠 역시 멕시코 이민자로 야오에게 고용되어 케이블 텔레비전 수리 일을 하고 있다.

루페가 설명했다. 루페의 아빠에 따르면 미국에는 두 가지 롤러코스터가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롤러코스터와 가난한 사람들의 롤러코스터.

좋은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자식들도 좋은 학교에 보낸다. 그러면 그 자식들도 자라서 돈을 많이 벌고, 그 자식의 자식들도 좋은 학교에 간다.

“그렇게 돌고 도는 거야.” 루페가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물었다.

“나쁜 롤러코스터를 타지. 우리는 부모님이 돈이 없어서 좋은 학교에 못 가고 좋은 직업도 못 얻어. 그래서 우리의 자식들도 좋은 학교에 못 가고 좋은 직업을 못 얻지. 그렇게 돌고 도는 거야.”

- <프런트 데스크> 101면

미아와 루페는 온종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부모와 이웃을 통해 가난이 개인 탓이 아니라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루페의 ‘롤러코스터론’은 개인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가난 혹은 부가 대물림되는 기제를 간파한다. 교육제도야말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롤러코스터라고 말이다. 중등 사립학교와 대학 학비가 가난한 이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비싼 미국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학벌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교육이 성공을 향한 마지막 카드로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한국 입시제도 역시 공교육만으로는 높은 수준의 성취가 거의 불가능해진 지 오래다.

가난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오겠다고 결심하는 미아와 루페에게는 어떤 미래가 이어질까. 이 책에서는 어린이가 가난 때문에 겪는 ‘소소한’ 일을 바로 이런 게 가난이라고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듯 속속들이 짚어낸다. 자외선 차단제가 비싸 한여름에도 긴소매와 긴바지를 입고, 의료보험이 없으니 다치지 않으려고 체육시간에 꼼짝 안 하고, 부모에게 주려고 점심시간에 쿠키를 챙기면서 체육시간 끝나고 먹겠다고 친구들에게 둘러대는 게 바로 가난이다. 어린이 일상의 매 순간을 제한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죄도 아닌데 숨기게 하는 가난을 보면 미아와 루페의 결심이 이루어지길 응원할 도리밖에 없어진다.

미아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종차별이 가감 없는 현실로 그려지는 만큼 서사의 해결에 있어서도 시종일관 골리앗 같은 현실이 버티고 서 있다. 다른 지역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모텔 운영 계획안을 모집해 맘에 드는 참가자에게 모텔을 증여할 것이란 소식을 듣고 미아는 부푼 꿈을 안고 응모하지만 사기성이 짙은 그 공모에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건 행운이 아닌 로또일 뿐이니까. 모텔 주인 야오가 급전이 필요해 모텔을 급매하려고도 하지만 매달 급여 750달러를 받는 미아 가족이 30만달러의 모텔을 매입해 고용을 승계하려는 계산 역시 결코 경우의 수가 될 수 없다. 절박해진 엄마가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형편을 털어놓으며 부탁했지만 베이징의 고급 주택을 사야 해서 돈을 빌려줄 수 없다는 충격적인 대답만 돌아온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마지막 지점까지 밀고 들어와 이제 그 이전의 질서는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한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자본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가난한 이민자들을 비롯해 미아의 투자 제안을 받은 이들은 100달러도 안 되는 돈부터 시작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공동으로 모텔을 사들인다. 물론 이를 가난한 자들의 연대가 이룬 승리로만 볼 수는 없다. 작품에서 따져 설명하지는 않지만 공동투자가 가능했던 건 30만달러의 칼리비스타 모텔이 한 달 1만2000달러, 1년 14만4000달러의 수익을 냈기 때문 아닐까.

미아는 롤러코스터를 갈아탈 수 있을지 몰라도 두 개의 롤러코스터는 여전히 따로 존재한다. “혼자 힘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없다면 다 함께 이루자고요!”(321면)라고 말하는 미아의 희망과 한계는 공존한다.

그럼에도 미아의 승리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가 노동하며 세계와 연결되고, 자신의 삶에 필요한 교육을 스스로 찾아가고, 사회적 억압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개인의 성장과 타인과의 연대가 선순환을 이루는 장면은 부자의 롤러코스터를 홀로 욕망하는 우리를 되돌아보기에 충분하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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