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내전도 국제전도 아닌 ‘세계내전’이었다[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면
전후 정전체제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축을
남북관계와 민족주의
중심으로 보게 된다
반대로 국제전으로 보면
한·미 동맹과 미·중관계에
매몰된다
결국 한국전쟁에 대한
두 개의 오랜 기존 해석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아직도 싸우고 있다. 한국과 세계에 이 문제는 단순히 지나간 사건을 탐구하고 규명하는 작업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늘의 한반도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출발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한반도 문제의 전형이자 오늘의 한반도 문제가 형성된 원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오독과 오해는 현재의 한반도 문제 해법에 대한 오판과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부터 말해 한국전쟁에 대한 두 개의 오랜 기존 해석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전쟁에 대해 내전과 국제전으로 이해하는 두 시각은 그 사건의 실질과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내전도 국제전도 아닌 세계내전(global civil war. Weltburgerkrieg)이었다.
공산진영 내전론은 시작부터 오류
내전적 시각은 한국과 조선(북한), 우파와 좌파, 이승만체제와 김일성체제 사이의 정통성과 우열 대결이 한국전쟁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내전론은 최초에는 전쟁을 시작한 공산진영, 즉 소련-중국-조선 쪽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승만 괴뢰정부와 괴뢰군대의 ‘38이북 지역에 대한 전면적 진공’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내란’ ‘내란도발’ ‘조선내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결정적 반공격’이 곧 이 무력충돌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공산진영의 주장은 시작부터 오류였다. 그들은 왜곡된 ‘북침’ 주장에 더해 한국과 한국군대를 괴뢰정부요 괴뢰군대로 규정했으나, 전쟁 시점에 남한과 북한 어느 쪽도 누구를 대리하지 않았고 괴뢰가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한국과 한국군대를 괴뢰정부와 괴뢰군대로 규정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북침전쟁은 ‘대리전’이어야 한다. ‘내전’과 ‘괴뢰’ 규정은 서로 맞지 않는 모순적 주장인 것이다. 조선과 중국은 오늘날에도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애초 잘못된 국가 공식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나아가 조선은 미국 참전 이후부터는 이 전쟁의 성격을 무력침략에 맞서는 민족해방전쟁·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급진주의의 해석들도 유사하다. 물론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일 수 없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주장의 뿌리가 소련이라는 점은 그동안 철저하게 간과되어왔다. 한국전쟁을 내전으로서 미국의 남북전쟁에 비유하면서 외부의 무력개입을 비판한 첫출발은 학문적 내전론이나 수정주의, 또는 실천적 민족주의나 통일주의가 아니라 소련정부였다(1950년 7월4일 성명).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남부와 북부의 분할선을 그은 외국도 없었고, 전쟁 개시 결정에 소련과 중국처럼 깊숙이 개입한 외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같다는 것인가?
한국과 조선이 괴뢰와 대리가 아니었듯, 국제전론 역시 옳지 않다. 이 전쟁이 다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또는 미·소-미·중의 국제전이었다면 김일성과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선제 결정과 침략 행위의 역할과 책임은 실종된다. 조선 공산지도부의 역할과 책임의 배제는 실제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전쟁 시작의 발단은 이들의 무력통일 의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역할과 책임을 방면하는 것은 정전체제 등장 이후의 심각한 남북 대결을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나아가 미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주체의 설정과 과제 추출에도 맞지 않는다. 즉 한국전쟁을 국제전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평화와 공존, 관용과 화해를 추구하더라도 진실의 외면과 왜곡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강조컨대 한국전쟁은 내전도 국제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과는 또 다른 세계내전이었다. 그것은 나폴레옹 전쟁, 1차대전, 2차대전과 함께 가장 전형적인 세계내전이었다. 고전 고대 시기에 한국전쟁에 근접한 전쟁은 페르시아전쟁이었다. 근대 진입 시점은 30년전쟁과 동아시아 7년전쟁이었다(이에 대해선 후술한다). 물론 한국전쟁은 국제화한 내전도, 내전화한 국제전으로 보기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쟁의 표면적 양상과 형태일 뿐 본질과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를 굳이 고르라면 후자가 본질에 더 근접하였으나, 그것도 세계내전과 같지는 않았다.
이제 내전론의 주요 주장을 살펴보자.
먼저 그것의 핵심 논지인 일제강점기의 토지구조 온존과 항일-친일 대립구도는 한국전쟁 당시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전론의 한 중심 근거는 지주들이 장악한 남한의 토지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로서 한국전쟁을 설명한다. 즉 남한은 전쟁 이전에 토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한국전쟁은 남한 농민의 해방을 위한 혁명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전혀 말이 안 된다. 우선 2차대전 종전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남한과 북한의 토지개혁을 비교하면, 내전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농민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더 우월한 토지개혁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다. 북한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주지 않고 단지 경작권만을 준, 사실상 국가지주제로의 전환이었다. 허위의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농민들은 북한과는 달리 토지개혁을 통해 자기 땅의 소유권을 제공받았다. 토지개혁의 방식 역시 지주와 농민의 요구를 절묘하게 타협한 제3의 길로서 중도주의였다. 이것은 건국헌법의 근본 정신의 반영이자,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에 대한 국가-지주-농민 사이의 대타협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토지개혁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이는 농민들이 대한민국을 지지한 근본 이유의 하나였다. 국제적으로 오늘날까지도 한국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성공적인 토지개혁 사례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의 토지분배는 분배의 양과 방식에 있어서 남한에 비하여 전혀 더 낫지 않았다. 농민 해방은 허구였던 것이다. 이 점은, 그토록 거대한 폭력과 유혈을 통해 얻으려 한 근본 목표를 뿌리부터 의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념·체제 위해 경쟁한 무력투쟁
이제 친일 문제를 보자. 친일 행위를 한 일부 사람들이 한국 군대와 경찰과 관료기구에 존재하였으나 그들이 두 한국의 체제 성격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었다. 그들 소수를 제거하기 위해 가공할 폭력과 전체주의를 강요하려는 전쟁 시도는 자유시민들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정부 각료급 이상 중 일본 협력 세력은 없었다. 의회 역시 극히 일부만이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침략자들이 주장한 친일 대 항일 구도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과 결코 대등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균열이 결코 아니었다. 즉 본질이 아니었다.
정의의 관점에서 분명했던 인적 청산 일부의 결여를 제외하면, 경제 구조와 정치 체제의 측면에서 탈식민개혁을 성공시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다. 남북의 체제경쟁 측면에서 당시의 민주주의 문제 역시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권위주의 체제 한국은 분명 약점이 많았다. 그러나 전체주의 체제 북한과의 비교에 관한 한 권력분립, 자유선거, 복수정당, 언론자유, 교육자치의 측면에서 크게 앞서 있었다.
내전론과 관련하여 전쟁의 등장 문제를 중심으로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점이 하나 남아 있다. 역시 시작은 소련과 조선의 초기 논리였다. ① 남한 내부의 사회·이념 및 무장 갈등 ② 남북 사이의 38선 국경 충돌 ③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사이의 합의에 의한 한국전쟁, 이 셋을 일련의 연결된 내전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①의 연장과 확장이 ②이고, ②의 연장과 확장이 ③이라는 주장은 전쟁 일반에 대한 기초적 이해는 물론 당시 실제 사실에도 맞지 않는다.
이는 식민시대에 형성된 지주-농민 계급 갈등과 좌파-우파 이념 갈등으로부터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는 수정주의의 오류만큼이나 틀린 접근이다. ‘남한 내부의’ ‘사회 갈등’과 ‘남북 사이의’ ‘무력 충돌’과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국제 결정’이 어떻게 같은 성격을 갖는가? 혁명이나 내전과는 달리 전쟁, 특히 대규모 세계전쟁은 아래로부터 형성되거나 도래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위로부터의 작위적·의식적인 고도의 전략과 선택, 공격과 침략 행위가 포함된다. 세계내전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전형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이 세계내전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두 한국과 두 세계진영의 체제 대결과 이념 대결이 한국전쟁에서 하나로 결정(結晶)되고 응축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는 세계 자본주의 진영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대결을 보편적 전체로서 담지하여 표상하고 있었다. 한국과 조선은 각각 두 진영을 가르는 세계경계선·세계분할선의 전방초소 국가들이었다. 동시에 둘은 자기 체제와 이념을 기준으로 하는 경쟁과 통일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즉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두 주체와 세계의 두 진영이 각기 자기들의 이념과 체제를 위해 경쟁한 무력투쟁이었다. 따라서 외부의 참전은 두 한국을 도와주는 행위인 동시에 각각 자신들의 가치와 이념을 위한 전쟁이었다.
우선 한국전쟁의 최초 기원인 한반도 분할선은 전적으로 국제 요인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즉 미·소의 합의의 산물로서 국제 분할이었다. 한국전쟁의 두 번째 기원인 남북 두 정부의 등장은 국제 요인 ‘미·소 대결’과 국내 요인 ‘좌·우 대결’이 밀접히 연결된 과정이었다. 분단정부 등장의 과정과 요인은 후자 역시 전자 못지않게 컸다. 여기에서 연립·연합·통일정부의 수립에 실패한 두 한국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국제적 힘의 충돌지점인 경계지대에서 분단이 내장할 세계 대결을 알았다면 연립과 연합은 필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정치·경제·교육·사회·이념·단일정당·무력 건설의 차원에서 먼저 분단정부를 수립하기에 바빴다.
한반도 해법서 이 둘은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지평이 아니다
한반도 문제는
한국전쟁처럼 언제나
남·북 대 국제 두 축을 내장한다
바로 거기에 연결과 단절의
경계지점이 존재한다
그 둘을 함께 볼 겹눈 못 가지면
우리의 평화와 안온은
계속 미뤄질 것이다
국제 요인과 한반도 요인 맞물려
기원에 이은 한국전쟁의 원인은 두 정부의 등장 이후 통일을 향한 서로의 불꽃 튀는 열망과 의지였다. 그러나 전쟁의 결정과 발발은 전적으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사이의 합의였다. 그들의 합의는, 2차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합의한 국제경계를 무력을 통해 붕괴시키려는 최초의 국제적 공동 결정이자 공격 행위였다.
전쟁의지의 표명은 김일성이 먼저 했지만 결정의 주도권은 스탈린이 강하게 쥐고 있었다. 그 둘은 비교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동의는 승인에 가까웠다. 김일성이 먼저 제안·설득했고, 이어서 스탈린이 허락·동의를 함으로써 전쟁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없었어도 이 전쟁의 최종 결정과 실제 발발은 불가능하였다. 스탈린의 글로벌 방혈전략과 김일성의 국토완정(完整)론이 만난 산물이 한국전쟁이었다. 물론 중간 매개는 중국혁명의 성공이었고, 둘 모두 마오쩌둥을 적극 끌어들였다. 마오 역시 둘의 계획에 동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군대 소속의 병력을 넘겨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전론의 심각한 논리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전제조건의 모순’을 말한다. 전쟁의 결정과 준비와 발발에서는 모두 국제 요인이 이미 깊숙이 개입하고는, 그에 대한 대응행위로서 국제 요인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전연 사리에 맞지 않는다. 전쟁의 결정과 발발부터 국제 요인이 깊숙하게 개입하여 시작부터 전혀 내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 이후 국제사회의 대응을 내전에 대한 개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모순인 것이다.
전쟁의 전개과정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념과 무기는 물론 전략과 전황을 결정한 핵심 요소들 역시 세계와 한반도의 힘의 대치와 배분 상태를 반영하였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베이징과 도쿄, 서울과 평양은 각각 세계, 동아시아, 한반도를 대표하여 한국전쟁의 전선을 향해 의지와 전략, 병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투사하였다.
당시 낙동강 교두보의 붕괴는 한반도의 공산통일을 넘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일본열도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의미했다. 낙동강 교두보는 대한민국의 최후 보루일 뿐만 아니라 자유진영의 최후 보루이기도 하였다. 낙동강 교두보는 동아시아 대륙 자유진영의 최후 대롱이자 꼭지였던 것이다. 반대로 북한에 대한 점령은 2차대전 이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자본주의 군대의 최초 진주였다. 또한 한반도 자유통일은 미국 군대와 자본주의 진영이 중·소의 턱밑에서 직접 국경을 대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전쟁의 기원으로부터 원인·결정·시작·전개·귀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검토하면 이 전쟁은 국제 요인과 한반도 요인이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맞물려 있음을 알게 된다. 전형적인 세계내전이었던 것이다. 세계의 진영 대결은 한반도로 응축되어 한국인들의 대결 속에 그들과 함께 발현되었고, 두 한국의 대결은 세계의 진영 대결을 선도하고 표상하였다. 전시 한반도는 진영 대결의 최전방이자 진앙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 전쟁은 세계 자유주의 대 세계 공산주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미국 대 소련, 좌파 대 우파가, 한반도에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가지런히 정렬된 편대를 형성하여 맞붙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전체로서 이 전쟁은 한국과 세계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체제전쟁이자 이념전쟁이었다. 즉 세계 분할합의(1945년)에서 시작하여 세계분단·민족분단(1948년)과 세계전쟁(1950년)·세계합의(1953년)를 거쳐 남북균형·세계균형(정전체제)으로 나아갔던 일련의 과정이 당시 한반도 문제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면 전후 정전체제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축을 남북관계와 민족주의 중심으로 보게 된다. 반대로 국제전으로 보면 한·미 동맹과 미·중관계에 매몰된다. 그러나 뒤에서 상세하게 살펴보듯 한반도 문제 해법에서 이 둘은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지평이 아니다. 한반도 문제는 한국전쟁처럼 언제나 한·조(남북) 대 국제 두 축을 내장한다. 바로 거기에 연결과 단절의 경계지점이 존재한다. 그 둘을 함께 보는 겹눈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적극적 평화와 안온은 계속 미뤄질 것이다.
■필자 박명림 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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