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 파격...폐암환자들에 무료로 항암신약 나눠준다
창업주 뜻 기려 급여 등재 전 무상 지원
약 1만 명 돌연변이 환자 혜택 받을 듯
유한양행이 8년 넘는 노력 끝에 만든 국산 신약 31호 렉라자를 폐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깜짝 선언으로 업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루 약 20만 원, 연간 약 7,000만 원(비급여 치료제 기준)에 달하는 비용 때문에 가뜩이나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환자와 가족이 큰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 제약사가 '파격 기부'를 택한 것으로 제약업계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유한양행은 1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렉라자 1차 치료제 조기 공급 프로그램(EAP)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EAP는 전문의약품이 시판 허가를 받아 진료 후 처방을 받을 때까지 해당 약물을 무상 공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반드시 각 의료기관 생명윤리위원회의 검토·승인을 얻어 담당 주치의가 평가한 뒤 환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하면 참여할 수 있다.
전국 2, 3차 의료기관에서 시행할 이번 프로그램의 대상은 렉라자 1차 치료 적응증에 해당하는 모든 환자다. 이전에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 비소세포폐암(암세포 크기가 작지 않은 폐암) 환자 중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EGFR)에 돌연변이가 생긴 환자가 해당한다.
조욱제 사장은 결정 배경을 두고 "지난해 말 폐암 환자 중 3세대 치료제를 복용하고 싶어 하는 환자가 많고 그분들이 국회나 보건복지부, 대통령실 등에 청원을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폐암치료제를 개발하는 회사 입장에서 가슴 아팠다"며 "폐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께 조금이라도 빨리 약을 드릴 수 있게 하자는 내부 의견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 신약은 1차 치료제에 내성이나 돌연변이가 생기면 보조 치료제 성격의 2차 치료제로 쓰였지만 지난달 30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1차 치료제 허가를 받았다. 회사 측은 렉라자가 1차 치료 급여 대상이 돼 약값이 낮아질 때까지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제약사가 만든 항암신약 중에 1차 치료제에 이름을 올린 건 렉라자가 처음이다.
글로벌 1위 약과 맞붙는 국산 항암신약…1차 치료제 진입 항암신약으론 최초
현재 국내에서 쓰이는 3세대 비소세포폐암 표적항암제는 아스트라제네카(AZ)의 타그리소뿐이다. 일부에선 "타그리소가 점유율을 높이기 전에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비급여 약물인 타그리소는 1차 치료제이지만 하루 약값만 21만 원에 달해 환자들이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타그리소는 전 세계에서 54억 달러(약 6조 원)의 매출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두 약이 모두 급여로 등재되면 현재 가격의 5%인 하루 1만 원, 연간 365만 원가량까지 약값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조 사장도 "자칫 오해를 살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며 "타그리소의 약가가 1년에 약 7,000만 원가량 되다 보니 효능을 알면서도 형편상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 제품을) 무상으로 드리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이 회사는 이번 결정에 앞서 전국 2, 3차 의료기관에 설문을 돌려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와 수요 등을 파악했을 만큼 준비도 철저히 했다.
업계는 유한양행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절박한 암 환자들의 치료와 유한양행의 마케팅 모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통상 건강보험 적용을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데 시장에 약을 빨리 내놔서 인지도와 영향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충렬 중앙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렉라자는) 타그리소처럼 3세대 EGFR 표적 약물이고 학회에서 발표된 저널을 보면 환자의 생존 측면에서 우월하다는 게 확인됐다"며 "(오래전에 나온) 1세대 약물을 쓴 환자는 쉽게 내성이 생겨 조직 검사를 한 뒤에야 타그리소를 쓸 수 있었는데 이제는 좋은 약을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돼 환자들에게 큰 혜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8년 걸린 항암신약… 급여 등재만 남았다
EGFR이 비교적 쉽게 발견는 돌연변이라서 이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 환자 수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국가 암통계를 보면 같은 해 발생한 전체 폐암 환자 수는 2만8,949명이고 이 중 렉라자의 적응증인 EGFR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 환자는 30~40%인 1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모든 돌연변이 환자가 비급여로 이 약을 처방받는 것으로 가정하면 유한양행의 사회공헌 규모는 1년에 7,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 약은 이르면 이달부터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을 것으로 회사는 보고 있다. 임효영 임상의학본부 부사장은 "EAP는 의료기관과 환자의 수에 제한 없이 시행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그동안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는 고(故) 유일한 박사의 창업 정신을 기리는 한편 수익은 사회와 주주에 환원하고 있다.
2015년 7월 국내 신약개발업체 오스코텍 미국 자회사 제노스코로부터 초기 물질을 도입해 오픈이노베이션(기술·아이디어를 외부에서 받아 개발하는 것)을 시작한 회사는 8년 가까이 100명 넘는 기술진을 투입해 신약 개발에 힘을 쏟았다. 2021년 2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은 뒤 같은 해 7월 급여 등재된 이 약은 지난달 1차 치료제가 됐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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