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미지의 영역 치매… 뇌 림프관 연구로 치료 길 열 겁니다"
'기능 저하 땐 퇴행성 뇌질환 유발' 세계 첫 규명
의사과학자 1세대… 암 치료 새방향 제시하기도
60세 넘은 지금도 새벽같이 연구실 출근 열정
"공부·연구 병행한 힘든 美 유학시절이 원동력
림프관 연구, 치매와 연결될 줄은 생각도 못해
한우물만 팔 수 있어 가능… 곧 의미있는 성과"
이준기의 D사이언스 고규영 기초과학연구원 혈관연구단장·KAIST 의과학대학원 특훈교수
여전히 연구에 목마르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연구실로 출근한다. 밤새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을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싶은 강렬한 연구 욕구 때문이다.
특히 그가 생각하지 못한 연구 아이디어나 성과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라 오는 날이면 자다가도 연구실로 향한다. 60세를 넘긴 지금도 연구에 있어서 만큼은 경쟁에서 지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한 분야에 대한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근성에서 천상 연구자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고규영 IBS(기초과학연구원) 혈관연구단장(KAIST 의과학대학원 특훈교수)은 의사에서 기초과학자로 전향(?)한 의사과학자다. 그는 항상 연구에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한다. 혈관분야 연구를 통해 사이언스, 네이처, 셀 등 세계 최고 학술지에 여러 번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아산의학상을 비롯해 호암상,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등 내로라하는 상들을 휩쓴 것도 연구에 대한 배고픔 때문이다. 그에게 연구는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기나긴 여정이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문학·예술 즐기던 소년, 의사 꿈꾸다
고 단장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우연한 계기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다. 어릴 적엔 서예를 접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다.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해 문과를 선택했다.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월남전에 참전한 이웃 형과 함께 전남지역으로 한 달 간 무전여행을 떠났다. 그러다 여행을 다녀온 후 폐렴과 결핵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고 단장은 "입원 후 거의 혼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병세가 안 좋아졌고, 다른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먹지도 못해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는 나중에 의사가 돼서 이들을 보살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퇴원 후 1년을 쉰 고 단장은 이과로 바꿔 의대 입학에 성공했다.
의대에 진학해 방학 동안 생리학연구실에 들어갔는데, 스승인 조경우 교수를 만나 의사보다 더 값진 일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 의사 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의생명 분야 연구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열악한 실험실에서 시약과 실험동물을 갖고 연구하는 게 너무나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나를 눈여겨 보던 조 교수께서 의사가 돼 환자를 고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기초의학을 공부해서 신약을 개발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줘 기초의학자가 되기로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의사 길 포기하고 '의사과학자'로 변신
고 단장은 대학원에 들어가 생리학 분야로 석박사를 받은 후 군의관을 거쳐 다소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코넬대 의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공부하면서 당시 주목받기 시작한 분자생물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돌이켜 보면 미국 유학시절 가장 힘들게 공부와 연구를 병행한 것 같다. 그 시절을 이겨낸 덕분에 혈관연구 분야에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의사와 연구자 두 분야를 다 경험한 고 단장은 분자생물학 관련 연구 수월성과 역량을 빠르게 쌓을 수 있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 심장연구소의 로렌 필드 교수 실험실로 옮겨 세계 최초로 실험 쥐의 심장줄기세포를 심장에 이식하는 데 성공, 세계 최고 학술지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 단장은 "미국 유학시절 바닥부터 경험하면서 나만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쓴 결과 심장줄기세포 생성과 분화기술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고생이 30년 넘는 연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자 경쟁력이 됐다는 게 고 단장의 설명이다.
◇혈관생성 연구 통해 '세계적 혈관 연구자'로 부상
고 단장은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95년 모교인 전북대 의대 교수로 돌아와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했다. 이 때 정부가 처음 시작한 최고 수준 연구자 지원 프로그램인 창의도전과제에 지방대 교수로 유일하게 선정돼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고 단장은 "당시 신성철 전 KAIST 총장, 김도연 전 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 걸출한 연구자들이 창의도전과제 1기로 같이 선정됐다"고 했다. 이후 보다 연구에 집중하고 싶어 5년 간의 전북대 교수직을 뒤로 하고 2000년 포스텍으로 옮겼다. 본격적인 의사과학자로 역량을 더 발휘하는 계기가 됐다. 산부인과의 도움을 받아 탯줄 내피세포를 배양해 혈관생성 매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에 파고들었다.
고 단장은 포스텍 교수로 활동하면서 또 한번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KAIST에 의과학대학원 설립을 추진하던 유욱준 KAIST 교수(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의 삼고초려 끝에 2004년 KAIST에 새로운 연구 둥지를 틀었다. 그는 "당시 유 교수께서 KAIST에 의과학대학원을 만드는데, 국내에 의과학 분야 기초연구자가 많지 않다며 KAIST에 와 주길 수차례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KAIST와 인연을 맺게 됐다"고 말했다.
KAIST로 옮긴 후 연구에 날개를 달면서 혈관 분야 세계적 연구자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심장줄기세포 이식 후 상당수 줄기세포가 죽고 그 부위에 새로운 혈관이 생성되는데, 이를 촉진하는 단백질인 '콤프앤지원(COMP-Ang1)'과 작동 기전을 밝히는 연구성과가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그는 "혈관생성 단백질과 관련 메커니즘 연구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해 혈관분야 연구자들로부터 공동연구 제의와 콤프앤지원 단백질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며 "우리만의 독창적인 실험과 컨셉으로 연구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지금의 IBS 혈관연구단으로 연구 조직을 키우는 기폭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암 등 혈관난치성 질환 새 치료법 제시로 '두각'
고 단장은 암세포와 혈관생성의 연관성 연구에 집중했다. 암세포가 성장하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암 혈관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기존 혈관성장인자(VEGF) 외에 또다른 성장인자(Ang-2)가 혈관신생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두 인자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이중혈관성장차단제(DAAP)'를 개발해 암 분야 최고 학술지 '캔서 셀'에 논문을 게재했다.
이어 암 혈관 생성을 막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암 혈관을 일반 혈관처럼 정상화시켜 암 진행과 전이를 억제하는 'TIE2 활성 항체'를 설계해 새로운 암 치료 방향을 제시한 점을 인정 받아 '캔서 셀'에 또 한번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이후 TIE2 활성항체가 패혈증, 당뇨망막병증, 녹내장 감소 등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잇따라 밝혀냈다. 그는 "우리 몸의 혈관은 마치 도로 같은 역할을 한다. 대동맥·대정맥은 '고속도로', 동맥·정맥은 '국도', 모세혈관은 '동네 길'로 각각 비유할 수 있다"며 "전체 질병 중 3분의 2 가량은 혈관과 연관돼 있을 정도로 혈관은 매우 중요하다. 장기별 혈관 생성과 질병 간 연관성을 규명하게 되면 암, 치매 같은 난치성 질환 치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체내 하수도 역할 '림프관' 연구 선도자로 '우뚝'
고 단장은 몇 년 전부터는 체내 상수도 역할을 하는 혈관에 이어 하수도 역할을 하는 '림프관'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모세혈관 옆에 있는 림프관은 신체의 체액과 면역반응을 조절한다. 그는 "림프관은 혈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덜 이뤄진 분야"며 "림프관이 장기별로 어떻게 생성·유지되고, 질병과는 어떻게 연관성을 가지는 지 밝히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단장은 특히 뇌막 림프관 연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몸에서 뇌는 가장 많은 활동을 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아 노폐물과 독성물질을 많이 생성한다. 이로 인해 노폐물이 뇌척수액에 녹아 있는데, 어떻게 배출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고 단장은 생쥐실험을 통해 뇌 하부에 있는 림프관을 통해 뇌척수액이 배출되고, 노폐물이 많이 쌓이거나 배출이 원활하지 않으면 치매 같은 퇴행성 뇌질환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내 2019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그는 "뇌척수액이 림프관을 통해 원활하게 빠져 나가게 하면 치매 등 뇌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결과로, 뇌막 림프관이 처음 발견된 지 150년 만에 주요 기능을 밝혀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암 전이와 림프절 연구로 같은 해 '사이언스'에도 논문을 냈다. 암세포가 림프절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포도당을 주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는 정설을 깨고, 지방산이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는 "암 전이의 첫 관문인 림프절에서 지방산을 차단하면 암세포 전이를 막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기전을 규명한 연구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결과는 림프절 전이를 표적으로 하는 차세대 항암제 개발로 이어질 수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뇌 림프관 연구로 '치매 극복' 길 열겠다"
고 단장은 치매를 다음 연구 타깃으로 정하고 연구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뇌척수액에 쌓인 노폐물을 배출하는 뇌막 림프관의 기능이 떨어져 치매를 유발한다는 자신의 선행연구를 토대로 뇌 림프관과 치매 간 상관 관계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뇌 림프관의 기능 저하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치매를 예방하거나 늦출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림프관 연구를 하면서 치매와 연결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며 "IBS 혈관연구단장에 선임된 후 한 우물만 파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존 연구가 확장돼 새로운 연구 아이템 발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지의 영역인 치매를 두고 많은 연구자들이 도전적으로 경쟁하고 있고 그 강도는 더해갈 전망이다. 고 단장은 "암과 달리 치매는 아직 밝혀진 게 많지 않은 도전적인 연구 분야다. 우리는 뇌막 림프관의 기능과 치매 간의 연관성을 밝혀낸 만큼 이 분야에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연구를 확장해 나간다면 의미있는 연구성과들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어 "최근 흥미로운 연구결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의 연구가 궁극적으로 치매 치료에 도움이 되는 혁신신약 개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원, 학생연구원, 국내외 동료 연구자들과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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