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과 수신료의 의미, 바로 짚었나
[시민편집인의 눈]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편집국장을 지낸 앨런 러스브리저는 몇년 전 트위터에서 끔찍한 소식을 접했다. 스웨덴 말뫼에서 무슬림 이민자가 10대 여성을 성폭행했는데, 여성의 중요 부위에 라이터 기름을 뿌리고 불까지 질렀다는 얘기였다. 트위터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가 퍼져나갔다. 은퇴 뒤 대학에서 강의하던 러스브리저는 팩트체크에 나섰다. 그런데 스웨덴 언론을 검색하다 벽에 부닥쳤다. 월 구독료 1만5천원가량을 결제해야 기사를 볼 수 있는 ‘유료화의 벽’이었다. 러스브리저는 저서 <브레이킹 뉴스>에 이렇게 썼다. “저질 정보는 아무 데나 넘쳐나고, 양질의 정보는 벽 안에 갇히는 세상이 됐다.”
그의 추적 결과, 끔찍한 이야기는 허위로 드러났다. 성폭행 사건은 있었으나 ‘라이터 기름 방화’는 없었고, (잡지 못한) 범인의 정체는 모른다는 게 경찰 발표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소수였다. ‘스웨덴의 잔혹 성범죄’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등 극우 정치인들이 거듭 언급하며 이주민·난민 혐오를 부추겼다. 러스브리저는 ‘양질의 뉴스는 엘리트의 것이 되고, 대중은 허위조작정보에 무방비가 되는 세태’를 우려했다.
전기요금과 함께 내던 한국방송공사(KBS) 수신료를 앞으로는 따로 내게 만들겠다는 정부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걱정스럽다. 더 많은 클릭, 더 높은 시청률, 더 큰 광고 수익을 위해 언론과 소셜미디어가 무한 경쟁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중심을 잡던 공영방송의 역할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비에스와 교육방송(EBS)처럼 수신료로 재정 상당 부분을 메우는 공영방송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무책임한 정보를 쏟아내는 미디어와는 다르게 운영될 수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감쪽같은 허위조작정보가 활개 치기 쉬워진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공영방송’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수신료 분리 징수로 수입이 크게 줄어, 케이비에스까지 ‘바닥을 향한 경쟁’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산골·섬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케이비에스가 믿음직한 ‘팩트체커’로 남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재난방송, 국제방송, 장애인 채널 등 공익성은 높지만 수익성은 낮은 프로그램이 줄 것이다. ‘허위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대중’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수신료 관련 언론 보도는 이런 우려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방송통신위원회 결정과 정치적 공방 등을 중계하는 수준에 머문다. 허위조작정보가 민주주의를 흔드는 시대에, 공영방송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조명하는 보도는 드물다. 그래서 ‘통합 징수를 안 한다니, 이제 수신료는 안 내도 되겠네’ 정도로 생각하는 시민도 많은 것 같다. <한겨레>는 그래도 기사와 사설, 외부 기고와 뉴스레터 등을 통해 이 사안의 배경과 의미를 충실하게 짚었다. 지난 2월 정순신 전 국가수사본부장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을 케이비에스가 단독 보도한 뒤 휘몰아치듯 추진된 수신료 분리 징수가 ‘돈줄 죄어 공영방송 길들이기’ 차원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공영방송의 가치와 수신료의 의미를 사회변화의 맥락에서 환기하고, 공론장의 토론을 주도해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실 케이비에스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해왔나 하는 질문에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대통령의 동정을 늘 첫 소식으로 다루던 ‘땡전뉴스’를 포함해, 누가 봐도 ‘정권의 나팔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늘 편파성 시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케이비에스의 노력이 충분했는지는 의문이지만, 현재 국내외 기관의 미디어 수용자 조사 결과는 케이비에스의 신뢰도가 상위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남은 과제는 케이비에스 내부의 지속적인 혁신과 함께 케이비에스가 더는 정치적 파도에 출렁이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손보는 일이다.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은 공영방송의 이사회 구성과 대표 선출, 재정 확충과 편집권 보장 등에 관해 근본적인 논의가 이뤄지도록 문제를 제기하고 입법을 압박할 의무가 있다. 이에 앞서, 방송법이 보장하는 수신료를 시행령으로 무력화하는 것은 퇴행일 수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공영방송은 다른 신문·방송의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와 언론생태계를 지키는 최전선의 동지라는 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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