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과학계, `MB 데자뷔`여선 안 된다

2023. 7. 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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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과학계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과학계에 주문했다.

다음날 과기정통부를 포함한 신임 차관들에게 "약탈적인 이권 카르텔과 과감하게 맞서 싸워달라"는 특명까지 내렸다. 차관 인사에서 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을 지낸 조성경 신임 과기정통부 차관이 포함돼 과학계는 더욱 술렁거렸다. 대통령이 발언했던 나눠 먹기식·갈라먹기식 R&D가 과학계를 'R&D 이권 카르텔' 집단으로 규정한 게 아니냐는 우려섞인 해석이 나왔다.

이 같은 과학계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내년도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안은 법정제출 기한(6월 30일)을 하루 앞두고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일선 연구현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25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주말 동안 내년 주요사업의 20%를 삭감하는 등 지출 구조조정안을 급하게 마련해 과기정통부에 제출했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올 초부터 애써 마련해 놓은 내년 주요 사업의 예산안을 이틀 만에 어떤 평가 기준과 절차 없이 졸속으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학계를 향한 압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감사원은 한국연구재단 등 국가 R&D 관련 연구기획, 관리, 평가 전문기관 10곳을 상대로 현장감사에 착수해 'R&D 이권 카르텔' 척결을 위한 칼을 꺼내 들었다. 지난 4일 기재부의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관행을 혁파하고, 30조원 규모의 R&D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키로 공식화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주일 사이에 벌어졌다. 이로 인해 과학계는 혼돈 그 자체이다. 대통령이 무슨 이유에서 갑작스럽게 내년도 R&D 예산안 재검토를 지시했고, 나눠먹기식 R&D가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정신이 없다.

여기에 R&D 이권 카르텔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 카르텔이 국가 R&D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 각종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만큼 대통령의 발언이 조용하던 과학계에 메가톤급 후폭풍을 몰고 온 셈이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MB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기조와 닮은 꼴로 전개되는 듯하다. 과학계에선 R&D 사업 전면 재검토와 R&D 이권 카르텔이 사실상 '한 지붕 두 가족'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혁신본부를 겨냥한 것과 다름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욱이 두 부처를 시작으로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국가 과학기술 시스템 재설계'를 위한 정부조직 개편 추진의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다소 앞선 관측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실제로, MB 정부 때 과기부는 교육부와 합쳐져 교육과학기술부로 개편됐고, 지금의 과학기술혁신본부는 해체되고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신설됐다.

하지만, 이런 정부조직 개편에 따른 시너지를 전혀 얻지 못했고, R&D 효율성과 생산성도 뒷걸음쳤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일례로, 과기부는 교육 이슈에 치여 제대로 된 과학기술 정책을 펴지 못한 채 소외됐고, 국과위도 R&D 시스템 개편 등 기대 했던 정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과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른 국가 리더에 비해 상당하다. 해외 순방 때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현장을 직접 찾아 연구자들과 대화를 하고, 자문도 구할 정도로 과학에 진심을 보여줬다. 정부 부처도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과학기술 투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R&D 투자를 늘려왔다.

아쉽게도 과학계 스스로가 대통령 눈높이와 국정기조에 부합하지 못한 면이 없지 않다. 과학계와 정부는 대통령의 지시 이후 누구 탓을 할 게 아니라, 연간 30조원이 넘는 R&D 예산이 제대로 쓰이는지, R&D 시스템과 제도가 낡은 관행과 규제에 갇혀 있지 않은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런 후에 우수한 연구자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과 경쟁하면서 연구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R&D 혁신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bong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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